직업에도 환승이 되나요?
학창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버스비를 제외하면 용돈이 없었기에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벌어 내가 사야 했다. 장녀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언니는 그런대로 부모님의 지원에 기댈 수 있었지만, 언니에게 받은 실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차녀에게는 지원도 기대도 없는 셈이었다.
없는 살림에 언니의 유학이 확정되니 나는 자연스럽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수의 대기업을 노린 것도 아니거니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경험과 어린 나이 덕분인지 모 주얼리 브랜드의 판매직에 입사할 수 있었다. 원체 사람과 대화하기를 즐긴 덕분인지 일은 적성에 잘 맞았다.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게 미안한 언니를 위해 매달 용돈을 부쳤다. 연년생 자매가 으레 그렇듯 당시에 언니와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니었는데 항상 무시당하던 내가 언니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은근히 기분 좋기도 했다. 스카이프로 종종 얼굴을 볼 수 있던 언니는 나에게 일하는 틈틈이 글을 쓰라고 했다. 이미 의욕도 열정도 사라진 내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불규칙적인 스케줄 근무와 온종일 구두를 신은 채 서 있다 보면 집에 와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당시 미미한 알코올 의존증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열정과 의욕 대신 자라난 건 시기와 질투였다. 학교와 학업 얘기로 꽃 피우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란 자격지심이 나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좀먹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체기처럼 앉을 때면 회사가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저 멀리 치워놨던 책이 눈에 어른거리고 놓고 살던 펜이 그리웠다. 억지로 모른 척, 이유 없이 아픈 몸을 전부 일로 얻은 병이라고 치부했다.
판매, 마케팅, 영업에 이르기까지 2년에 한 번씩은 메뚜기처럼 회사를 옮겨 다녔다. 나중에는 그간의 영업 경력을 높이 산 기업에 취직까지 했으니 나의 환승 이직은 나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니 종종 글을 다시 써보고 싶다는 욕심에 펜을 들어도 놓고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예전만큼 술술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깎아먹은 자존감은 ‘그것 봐. 네가 하긴 뭘 한다고.’하며 나를 비웃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하면 된다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는 과정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 진리를.
그것도 고작해야 수많은 환승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