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NCHE by ByRedo
겨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마음이 시릴 때가 있다.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을 때, 가정에서 식구들에게 서운할 때, 세상이 혼자라고 느껴질 때......
그런데 이불 속에 들어가서 온 몸을 맡기면 그 추위가 약간은 사라진다.
포근한 이불 때문인지, 이불에 스며든 나란 존재의 체취인지, 아니면 빨아서 잘 말린 이불에서 나는 냄새인지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밤하늘에 뜬 별과 달, 그리고 편안한 몸과 품어 주는 이불, 그것 하나로 하루를 마치면서 속으로 '그래도 다행이야'를 중얼거리게 되는 그런 날들이 있다.
나는 좀 사치스러운 잠자리를 만든다. 내 이불은 덴마크산 거위 깃털로 만든 것이다. 베개 또한 덴마크산이다. 백화점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나의 경제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과분한 것들을 샀다. 그리고 그 비싸디 비싼 바이레도의 블랑쉬를 듬뿍 뿌린 다음 그 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런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십년 째 불면증을 달고 산다. 잠을 안자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잠을 자지 않는다. 그리고는 몸이 더 견디지 못해 쓰러지면 그 때서는 시체 한 구가 된 것처럼 먹지도 않고 잠만 잔다. 최악인 상황일 때 극단적인 예이고, 보통은 술을 한잔두잔 마시곤 했다. 교과서에서는 술은 우울증 유발인자이며 수면장애의 원인인데,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내가 된 것 같지 않은 기분에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시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뒷 목이 뻣뻣해 졌다. 낮 동안 한 긴장을 풀지 못하는 것이다. 눈을 감은 채 밤을 새고 낮에 활동을 한 적도 많다. 아마 박사 논문을 받을 때 심했고, 회사 다닐 때는 극에 달했던 것 같다. 그나마 회사는 재택근무 하는 날이 일주일에 2번 있어서 그 전날에는 수면제에 의지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불면증을 치료하는데 역할을 한 것이 있다. 바로 BYREDO의 BLANCHE라는 향이다.
너무 흔하면서도 친숙한 것 처럼 느껴지는 향이라 사악한 가격을 생각하면 대체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향 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
친숙한 그 향이 가져다 주는 추억이 있다. 어렸을 적 깨끗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엄마 옆에 있으면 내몸에도 엄마에게도 좋은 향기가 났다. 그 시간으로 나를 돌려주는 마법 같은 향이라 왠지 싼 향수를 사면 내 그 작은 기억조차 값싼 것으로 변할 것 같은 불안감에 항상 사악한 가격(?)의 같은 향수를 매번 사곤한다.
낮에 싫은 소리를 듣고 잔뜩 기가 죽어 혼자 이불 속에서 울고 싶을 때 이 향이 나면 '그래도 비를 가려주는 지붕이 있고, 나를 덮는 포근한 이불이 있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니 다행이야.'를 중얼거리도록 하는 이 마법과 같은 향이 나의 긴장을 풀어 주기도 한다.
사람이 어찌 항상 즐거울 수 있으랴. 때로는 나와 피를 나눈 형제도 멀게 느껴지고 세상이 온통 내 등에 업힌 짐처럼 꽉 눌러 어깨가 뻣뻣하고 온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지 못해 어쩌지 못하고 억지로 불을 끄고 눈을 감고 있기만 할 때 은은히 이불 속에서 나는 이 향 덕분에 한숨 푹 쉬며 잠을 청할 때가 있다.
이 넓고 드넓은 우주 속에서 하찮은 존재일지 모르나 이불 속에서 나는 은은한 이 바이레도의 블랑쉬 향과 나만이 내가 먼지같이라도 존재했다고, 사라지는 향기같은 존재 일지도 모르지만 한 때는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이었던 존재였다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이 향이 나는 겨울 이맘때 쯤이면 항상 제일 고파(?)진다. 그래서 아끼고 아끼다가 이제야 글로 소개해 본다. 많은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마법 주문, 욕심내고 싶은 나만의 향이기 때문이다.
BYREDO의 BLANCHE는 한 마디로 '깨끗한 비누향'이다. 아마 바이레도라는 브랜드가 세계 향수 시장에서 자리 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향일 것이다. 조향사도 '피부의 향기, 갓 빨래한 세탁물 향기'를 의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막 뿌리면 어디서 맡은 듯한 꽃향기가 달콤하게 난다. 장미 향을 바탕으로 알데하이드 성분이 향을 널리널리 퍼트린다. 깊숙한 작약향과 제비꽃 향이 내 몸에 점점 스며들어 결국 진지한 머스크와 샌달우드 향으로 끝난다.
늘 가까이 있지만, 잡기 어려운 그것. 행복도, 행운도, 어쩌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