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생각 없이 덜컥 퇴사해버렸지 뭐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라 사람들에게 턱을 치켜들며 나 이런 용감한 여자야 라고, 당차게 말하고 싶지만 사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줬다. 은혜 갚은 까치처럼 까아까아 거리며 줄 거 다 주고 너덜너덜 조용히 얌전하게 퇴사했다. 직장인은 늘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말이 존재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수틀리면 언제든 퇴사할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희노애락이 아닌 노애노애로 가득찼던 나의 하루하루가 모여 '퇴사'라는 한 가지 목표에 십시일반 빡침 포인트로 적립되어 만기가 되기를 기다리던 중 하나의 큰 사건이 마침내 퇴사의 골든벨을 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퇴사라는 꿈을 이룸과 동시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기적의 논리를 직접 깨닫게 되는 값진 경험도 했다.
모든 관계에는 자연의 법칙처럼 갑과 을이 존재한다. 대부분 직장인을 을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내가 일한 어학원에서 나는, '을'이 아닌 갑을 병정에서 '정'을 맡았었다. 먹이 사슬에서 가장 밑바닥인 바닥이라고나 할까 아니다 어쩜 바닥보다 더 바닥인 지하동굴일지도 모른다. 학부모한테 치이고, 원장한테 까이고, 학원생들에게 굽신거리고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 비위 맞추다 보면 자존감 파괴는 물론이거니와 집에 오는 길에 이별한 적도 없는데 이별 노래 들으며 누구보다 세상 서럽게 울곤 했다.
이 모든 걸 참고 견딜 수 있는 건 단 하나, 돈이었다.
미래의 내가 잘 살기 위해서 과거와 현재의 내가 합심하여 온갖 수모를 겪는 것뿐이었다. 난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같이 기나긴 세월을 손잡고 견뎌줄 남편도 없으며, 차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가여운 대한민국 30대 노처녀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나를 부양할 의무가 있으므로 미래의 나를 지키기 위해 오늘의 내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항상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감안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을 수없이 하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결론은, 늙어서 추운 날 성치도 않는 두 다리로 버스 기사 눈치를 보며 버스를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보다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게 덜 서러울 것 같다. 아직 오지도 않는 먼 미래의 상황에 심각하게 이입되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끼고 참고 살아야지 싶어 자존심을 억눌러가며 하루하루 할당되는 불행을 두 팔 벌려 몸소 받아낸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던 잔잔한 호수 같은 나의 고단한 삶에 같이 일하던 직장동료가 돌멩이 하나를 던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파동으로 인해 조용히 지하 바닥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던 나의 '자존심'이라는 괴물이 깨어나 버렸다. 평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며 웬만하면 그럴 수도 있지, 참고 넘어가는 성격인데 이번 일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폭발해 버렸다.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입 다물고 있으니, 거짓이 진실이 되어 버렸고, 소리 내서 떠드는 사람이 가만히 참고 있는 사람보다 더 동정심과 위로를 받게 되는 현실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정말 가마니로 보겠다 싶어 나의 입장과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도미노처럼 빠르게 쓰러져 나가던 소문의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누가 들어도 일방적이고 비상식적인 마녀사냥이였기에 당연히 아무 잘못없는 내가 유리한 입장이라 모두 토닥여 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가장 이성적이고 정확히 판단해야 할 원장이 나를 저버렸다. 내 편을 든 것도, 그 사람 편을 든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입장 표명이라고나 할까. 오히려 성격 좋은 이번에만 참고 먼저 다가가 미안하다고 손 내밀어 주면 안 되냐고, 회사가 나에게 도리어 그 이상한 선생님을 회유해달라는 그때, 나는 느꼈다.
여기까지다.
이 회사하고의 관계는,
나를 딱 이까지만 생각해 주는 사람 밑에서 열심히 내 가족 같은 회사라 여기며 일해줄 필요가 없다는걸. 가족같은 회사가 아니라 그냥 족같은 회사였다. 나는 회사가 곤란하고 힘들 때 먼저 앞장서서 이끌어 주고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고 다 같이 으쌰 으쌰 하자며 힘 실어 주며 내 청춘 다 바쳐 일했는데, 정작 내 편이 필요할 때 선을 그어버리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그려질 내 미래는 없었다. 난 그저 열심히 호구처럼 일하는 헌신짝이고 가마니였을 뿐이었다.
고민할 거 없다.
퇴사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인격을 존중해 주지 않는 회사에서는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리를 벅차고 한바탕 우당탕탕 집어던지고 찢고 고함지르고 동네 사람들보세요 이곳이 지옥입니다요 깽판 치고 나오고 싶었지만, 인수인계도 해줘야 하고, 마무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많아 그로부터 4개월간 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주었다. 사실 6개월 치 자료까지 만들어 주고 조용히 얌전한 퇴사했다.
으이고 쪼다새끼.
뼛속까지 호구이고 헌신짝인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