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엄지손가락뼈
현강은 갈룬소가 내민 2센티 남짓 되는 조각 뼈를 받아들었다. 현강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느 시신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신경줄이 팽팽해지는 걸 느끼며 현강은 말했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손가락 뼈군요.”
갈룬소 눈이 둥그레졌다.
“엥! 어떻게 알았지? 고고학자라더니 역시 다르시네. 이 쪼그만 뼈를 보고도 턱, 알아맞히고.”
현강은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갈룬소의 눈길을 느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소물이 말을 받았다.
“박사님은 이런 거 전문이니까요.”
소물은 대신 대거리를 하며 갈룬소 찻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갈룬소는 은은히 퍼지는 차향을 맡으며 연구소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는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 매우 비좁게 느껴졌다. 다시 보니 꽤 넓은 공간이었다. 연구실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가벽 역할을 하는 폭넓은 책장과 대낮의 강렬한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 닫아 놓은 갈색의 베니션 블라인드 때문에 공간이 좁아 보인 것뿐.
“저 뒤에도 다 책이요?”
갈룬소가 호기심이 이는지 눈으로 책장 뒤를 기웃거렸다.
“아니요. 책상이 있어요. 여기는 제 연구실이거든요.”
“아.”
갈룬소는 찻잔을 들어 후르릅 차를 마셨다. 소물은 그런 갈룬소를 바라보다 곁에 있는 사람은 아랑곳않고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현강을 돌아보았다. 현강의 표정은 꽤나 복잡해 보였다. 현강은 소물에게 매령시에 사무실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며 말했다. 아사강 유역에서 뭐든 나와야 한다고. 토기든 석촉이든 뭐든 나와야 명분이 서고, 세계를 설득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고. 그런데 뜻밖에 갈룬소가 오래된 뼈 조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마침 현강이 방문한 날에. 소물은 너무도 설레어 현강의 특별 지시가 없었음에도 스스로 차를 내오고, 밝은 얼굴로 갈룬소의 말에 대거리를 하며 손님 접대를 했다. 정작 현강은 말이 없었다.
작은 조각 뼈를 마주한 현강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생각에 잠시 뇌의 작동을 멈춰 세워야 할 판이었다. 만약 이 작은 조각 뼈가 현강이 찾아 헤매던 그 것이라면 세상은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대 측정을 해 봐야 하고, mtDNA 검사도 해봐야 한다. 검사를 해 보며 자연 알게 될 것이다. 이 손가락 뼈의 주인공은 어느 시대를 살았으며, 여자인지 남자인지, 사망 당시는 몇 살이었고, 여자라면 자식은 낳았는지 그리고 왜 죽었는지. 현대 아스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지금은 작은 손가락 뼈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무덤을 발굴하면 인골의 생전 모습까지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스란과는 전혀 상관없이 십수 년 전에 죽은 어느 종족의 유골일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강은 예감했다. 기다리던 것이 마침내 왔다는 것을.
현강이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갈룬소는 불안한지,
“조금 큰 걸로 가져올 걸 그랬나?”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며 현강의 낯빛을 살폈다.
“뭐 조금 더 큰 걸로 가져올 수는 있긴 했죠. 하지만 그러다 흔적이라도 남으면 낭패 아니겠습니까. 나만 곤란해지는 거죠.”
갈룬소가 가져온 것은 손가락 뼈 하나였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했다.
“석관에서 나온 뼈라고요?”
현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허참. 사람 말 되게 안 믿네. 그럼 내가 남의 무덤을 파 가져왔다는 겁니까?”
갈룬소는 성질을 부리며 거칠게 받아쳤다.
“박사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냥 확인하시는 겁니다.”
소물이 갈룬소를 달랬다. 현강이 다시 물었다.
“인골은 제대로 다 있던가요?”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아닙니까. 그 증거로 이 뼈를 가져온 거고요.”
30년 전 용성제국은 아스라인들에게 강제 이주 명령을 내렸다. 아스라인들은 거부했다. 그 후 아스라의 땅에 저주가 내렸다. 겅중거리며 뛰놀던 숲의 동물들은 몸이 바짝바짝 마르며 죽어 갔고, 나무와 풀들도 빠른 속도로 누렇게 시들어 가며 죽었다. 사람들도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산불이 났다. 언론들은 일제히 아스라의 땅에 신의 저주가 내렸다며 요란스레 떠들어댔다. 아스라인들은 알았다. 저주는 신이 아니라 용성제국 황제의 명으로 내려졌다는 것을. 나무와 동물들을 말려 죽이고, 산에 불을 지른 것은 황제였다는 것을.
생명 있는 것은 그 무엇도 더는 아스라의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스라의 대사무 산동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숲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스라인이여, 돌아오라. 돌아올 그날을 위해 아스라인이여, 부디 살아남으라! 떠나라! 아스라의 대사무 산동은 아스라의 숲에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다.”
대사무 산동은 어린 쌍둥이를 사람들에게 맡기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