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맞지않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할건지에 대하여
평생을 걸쳐 가장 욕을 많이 먹었던 시기는 아마 대학생때였고, 엄마로부터였으며, 주로 과음을 한 다음날 이른 아침에, 가장 두둑이 먹었지, 싶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줄 모른다고 20대에 시작된 나의 사춘기는 10대에 그 시기를 넘긴 이들의 그것에 비해 몇 배는 지독하고 매콤한 놈이었다. 갈등의 중심에는 당연히 술이 있었다.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딸들을 향해 퍼붓는 저주를 거의 다 들어본 것 같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너도 딱 너같은 딸 하나 낳아서 길러봐라, 이꼴저꼴 안보려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저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 씨도둑질은 못한다고 어쩜 지아빠랑 술먹는 것 까지 저렇게 닮았냐 까지 다 들어봤지만, 내 태도에 변화가 있을 리 없었고, 오히려 나는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하던대로’ 했다. 집에서만 싸가지가 없으면 그건 사춘기고, 밖에서도 싸가지가 없으면 그건 못된거라는 사춘기 판별법대로라면 나는 영락없이 사춘기였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을 걱정시키면서도 당당하고 멋대로였던 나는 바깥에서는 누구보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혈기를 함부로 토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를 뽀송하고 포근한 이부자리가 깔린 데에서만 키워왔던 엄마는 세상으로 무람없이 걸어들어가는 내가 못내 불안했다. 당신이 온실속의 화초인 줄 알고 키운 것은 그러나 사실 분별없는 망아지였고, 요조숙녀가 아니라 천둥벌거숭이였다. 엄마가 초조해하는 사이 나는 예민하고 입맛 까다로운 엄마 밑에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감자탕의 참맛을 배웠고, 순대국밥에 마시는 소주 한 잔의 진면목을 친구들과 알아갔다. 엄마의 그늘을 벗어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그때의 나를 닮아있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금테가 둘러진 요람안에서 키우고 싶어했지만 나는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막걸리집의 창문도 없는 다락에서 막걸리만큼이나 많은 담배연기도 함께 마시며 자주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뿅하고 만들어져있는줄 알았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쉴새없이 알바를 해야하는 아이들을 보았고,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엘 진학하는 루트도 세상에 존재하며, 재수를 한 한 살 많은 언니오빠들과도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혼가정의 그늘을 극복하기위해 더 밝게 웃는 아이의 나보다 밝은 얼굴을 보기도 했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 약점을 다른 데서라도 만회하기뒤해 애써야 한다는 그 아이의 상기된 얼굴을 술자리에서 보았다. 다양한 삶과 사람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엄마가 정해놓은 테두리의 정확한 대척점으로 나의 목적지를 정할 필요는 없었던거지만서도, 발현되지 않았던 나의 바탕이 그러했으니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의 요구사항은 당연히 ‘금주’ 였다. 하지만 다른건 다 양보해도 양보할 수 없는 내 단 하나의 항목 역시 술 이었다. 당시에 나는 술을 마시면 막차가 끊기는 시간까지 마시다가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거나, 밤새도록 마시다가 첫 차를 타고 집에 가거나,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는 H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수업을 듣거나 셋중 하나였다. 그 중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3번이었지만 내 선호도가 어떻든지와는 상관없이 엄마에게는 셋 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쥐콩만 한 여자애가 겁도 없이 술을 마시느라 집에를 안들어오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철이 없다 싶지만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고, 넘지말라면 어떻게든 넘어가며, 가지말라면 기어코 가고야 마는게 인간의 반항심인 것이다. 더구나 10대를 고치 안에서 조용하고 순종적으로만 살아온 내가 처음 만끽하는 자유를 막아서는 엄마의 말을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희한한 객기가 발동했다. 그렇게 한치의 물러섬과 양보도 없은 팽팽한 대치를 이어가던 날들중에 사건은 기어이 터졌다.
그날은 앉으면 끝장을 보는 대학교 친구가 아니라 동네 친구 S와 술을 마셨다. S는 반드시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하는 효녀(?)였던지라 우리는 11시 반쯤 일찍(?)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날이 몹시 추워서 잔뜩 웅크리느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렇다. 흔히 있는 일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충분히 넘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려면 모든 우주의 기운이 그걸 돕는다고, 그날 어떤 우주의 기운이 내게 몰려온건지 그만 나는 앞니를 깨먹고 말았다. 녹지않은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던 길바닥 위에서 용케 남은 이의 조각을 찾았고, 고이 챙겨서 집에 돌아가면서 '치과에 가서 붙이면 된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술기운과 추위가 한꺼번에 나에게로 진격해와서인지 통증은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게 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 살다살다 그런 통증은 치과 단골 20여년만에 처음 느껴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출산과도 비견할 수 있는 아픔이었다. 입만 벌려도 아파서 뭘 먹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살짝씩 걷기만 해도 머리가 울려오고 그 울림이 앞니끝까지 전해지며 온 신경이 이빨 끝에 또아리를 튼 것 같았다. 앉지도 서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상태로 엄마한테 갖은 찰진 욕들을 고루 먹으면서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치과엘 갔다. 그런 자세로 치과에 가서 들은 얘기는 엉거주춤한 내 자세보다도 더 절망적이었다. 나의 이는 이제 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당연히 그러므로 남은 조각은 붙일 수도 없으며, 여러 차례의 신경치료료 남아있는 신경을 다 죽이고 뿌리부분만 남긴 채 새 이를 씌워주어야 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 앞니는 사형선고를 받으 거였다. 그 사형선고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엄마에게 나는 ‘술먹다 이빨 깨먹은 애’ 가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리는 없었을테지만 엄마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눈치였다. 아니나다를까 엄마는 전면금주령을 내렸다. 치아를 치료하는 기간을 지나 앞으로 계속해서 술을 마시지말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 때 나는 대역죄인이며 슈퍼을이었으므로 일단은 엄마의 말을 수긍하는 척 했지만, 나도 일보 전진을 위해 전략적으로 일보 후퇴했을 뿐, 애초부터 금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1만큼도 없었다.
1. 외박을 하지 않는다. 그게 그 다른 어디가 아니라 H의 자취방이더라도.
2. 연락은 반드시 받는다. 술자리에 가기전에 핸드폰에 이상이 있다면 해결한 상태에서 참석한다.
3. 연속으로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중간에 단 하루라도 텀은 반드시 두겠다.
지금 기억으로 몇 차례의 신경치료를 거쳐 새 치아를 끼울 때까지 꼬박 3주정도의 기간이 걸렸고, 그동안 나는 조신하게 집-학교를 오가며 술은 냄새도 안맡고 지내다가 비로소 이 치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고심끝에 엄마에게 음주강령을 제시했다. 위의 세 가지 강령중에 하나라도 어긴다면, 그 때부터 나는 엄마딸도 아니고 내놓은 자식이 되어도 좋으며, 그게 아니면 당장 술을 끊으라고 하면 끊겠으니 전면금주는 거둬달라고 참 읍소를 하였다.
이러고도 술을 못끊는 나를 보며 엄마는 기가 찼지만,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에게 이러고도 끊을 생각이 없을만큼 술을 좋아하는 얘를 막을 길은 없겠구나, 하는 체념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엄마는 못이기는 척, 밑지는 제안이지만 받아들이는 척, 내 강령을 받아들였고 그런대로 엄마와 나 사이의 평화로운 음주계약은 체결되었다. 그랬더니 이상하리만치 자유롭게 술을 마시면서도 엄마에게는 고분고분한 딸이 될 수 있었다.
이 때에 어린 나는 관계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건, 뜬구름잡는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계획이라는 걸 무심히 깨달았다. 그러니까, 좋은 딸이 되고자하는게 아니라 나쁜 딸이나 되지 말아야지 하는 지극히 냉소적인 다짐이 나를 결국 좋은 딸로 이끄는 시작이라는 걸 알았는데,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려면 나쁜 엄마가 되지 않는 게 우선이고, 좋은 배우자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은 배우자에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이란 결국 나쁘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술꾼이란 세상에 없는 바, 술을 마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의 동의와 이해가 필요한 거라면 내가 해줄 말은
“이제 술 끊을게!”
라는 지나가는 개도 안믿을 거짓말 말고,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절대로 넘지않을 선을 정하는 쪽이 훨씬 빠르고 믿음직스럽다는 얘기다. 절대 술값을 혼자 계산하는 객기는 부리지 않겠다든가, 술을 마시고 결단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든지, 인사불성이 되어서 경찰차에 실려가는 일만은 피하겠다거나, 연락은 반드시 하고, 받겠다든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마시지 않겠다는 등 음주를 하면 나오는 버릇이나 습관, 가족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분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런게 필요하다. 좋은 술꾼이란 세상에 없는거라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애주가는, 분명, 있다, 고 믿는다.
아, 물론 여느 딸들이 어느정도 엄마의 속을 끓이고, 애를 태우며 커가는 건 국룰이라 그 후로도 나는 몇 차례 약속을 어겨 엄마에게 등짝을 맞고 욕을 들어먹은 일이 몇 번 있습니다만, 이는 한번밖에 안깨먹었습니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