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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 Mar 10. 2023

마음의 허기는 어떻게 채우나요?

19. 문제는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생각이 복잡해 감정이 올라오면 먹는 것으로 회피했다.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음식에 의지하면 상처받지 않고 쉽게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먹어도 먹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듯 임신과 출산, 육아 모두 처음 겪는 것으로 익숙지 않았다. 꿈도 많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스물한 살 대학생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는 대구로 와 부대로 출근하는 시간을 앞당겼다.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기 위해 세 시간 일찍 새벽 6시에 출근을 했다. 나 또한 그가 일하는 동안 서툰 솜씨지만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아이를 열심히 돌보았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육아에 익숙해졌다. 아이를 보면서 저녁식사도 준비하고 낮잠 시간이 되면 아이의 예쁜 사진을 골라 양가 어머님들께 보내드렸다.

그토록 바라던 안정적인 삶이었을지 몰랐다. 매일이 비슷한 패턴으로 돌아갔고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안이 존재했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불안했다.

언젠가 깨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이 나의 자리인가 의심이 들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는 건 적응이 되어도 한 번씩 너무나 생경했다.

그가 시부모님의 바람대로 계속 직업군인을 한다면 우리는 두 해가 바뀔 때마다 지방 곳곳으로 준비도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내 아이도 나와 같이 이사와 전학을 겪어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에 깜깜했다. 그도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아 복무 기간이 끝나면 전역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막상 군대를 나와도 그도 나도 아직 마땅히 이뤄놓은 것 없이 맨몸으로 다시 사회에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었다. 우리는 상의 끝에 결정을 내렸음에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일단 그는 1년 더 군 복무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다음 해가 되어 우리는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며 아직 어린 아기를 데리고 *스드메와 결혼식장까지 알아보기에는 무리였다. 경제적으로나 여러모로 양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겼다.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고 생채기가 났다. 시부모님과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결혼식만큼은 신부에게 최대한 맞추어 원하는 방향으로 해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친정 부모님은 묵묵히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결혼식 준비가 진행될수록 점차 어딘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시부모님께서는 항상 그를 통해 나에게 의견을 전하셨고, 아이를 돌보며 낮 동안 열심히 알아본 나의 노력은 그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다.

아이는 곧 이백일을 앞두고 있었고 그 사이 돌잔치와 시어머님의 환갑도 준비해야 했다.

애초에 내가 꿈꾸던 결혼식이나 나의 마음은 단 하나도 고려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문제 앞에서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준비 내내 그저 예상금액에 맞추려 급급했다. 나 혼자만 결혼식에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이미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은 후 올리는 결혼식이었기에 내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내게 상처로 남았다. 웨딩촬영에서도 그는 빨리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고, 액자와 앨범을 셀렉하는 날마저 한 장이라도 얼른 넘겨 금액을 줄이고 싶어 했다. 사진 속 우리의 모습은 그에게 중요치 않아 보였다.

'이미 함께 살고 있고, 아이까지 낳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생각했다.  

지금도 웨딩촬영과 앨범은 떠올리면 아프고 상처로 가득한 기억이다. 서로를 비난하면서까지 힘겹게 마친 웨딩사진 앨범은 결혼식이 취소된 후 완성됐고, 그와 나 누구도 찾으러 가지 않아 버려졌다.


더는 결혼식이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다. 우리 둘의 결혼식인데 그도 나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했다. 내가 알아보지 않고 맞추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진행되는 게 없었다. 그 사이 그는 그대로 지치고 나 또한 마음이 지쳐갔다.

도중에 출산 후 다시 오른 체중을 조금이라도 조절해 예쁘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은 바람에 다이어트를 병행했다. 불안과 스트레스가 쌓이면 식이를 조절하기 힘들었기에 그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육아와 결혼식 준비를 병행하며 그와의 대화 속 어디에도 더 이상 우리는 없었다. 서로의 문제보다 외부의 요인들로 다투는 날이 많아졌다. 갈등이 커질수록 다투는 횟수가 늘었다. 그는 여전히 싸울 때마다 입을 다물고 문제를 회피했다.


그 무렵 아이는 밤마다 성장통으로 울었고 우리는 아이를 달래다 서로에게 감정이 상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놔두길 원했고, 나는 아이가 너무 오랜 시간을 우니 안쓰럽고 까무러칠까 두려워 안아 달래주었다. 겨우 아이를 재우고 그가 잠들면 그제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피곤함에도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가로등마저 꺼져 어두워진 거실로 나와 식탁 의자 끝자락에 앉아 베란다 너머 달을 응시했다. 빛으로 가득 차 완전한 구 형태의 보름달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흘렀다. 텅 빈 내 모습이 창문에 비쳐 보였다.




찰나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꿈이 전부였고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때 나는 이미 마음이 텅 비었다는 생각을 했다.

겨우 스물넷이었다.

어릴 적부터 입버릇처럼 말해온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고, 나는 나로서 멋지게 꿈을 이루며 살겠다'라는 다짐도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와 달리 그는 결혼 후 첫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있었다. 조금은 부럽고 질투가 났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자신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오고 군생활동안 기다리고 도왔으니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그때는 못다 한 학업과 꿈을 이룰 때까지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돕겠다고 그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결국 그의 말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고, 우리는 이혼을 했다. 그토록 온 힘을 쏟았던 결혼식은 미처 올리지 못하고 전날 무산되었다.

그날부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아이와 함께 친정에 들어가 정신없이 매일을 견뎠다. 생각을 멈추고자 나가서 걷고 또 걸었다.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면 고장이라도 난 듯 눈물이 흘렀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내 안에 남은 눈물이 없겠다 싶을 만큼 울었다. 자책과 후회가 밀려왔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겪어온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모두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한없이 울다 지치면 무언갈 입에 넣었다. 머리가 멍해져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서, 슬퍼서 음식을 먹었다. 먹고 또 먹어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그와 함께한 추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거대한 파도처럼 원망이 몰려와 나를 덮쳤다. 그 원망의 파도는 그에게서 시작되어 부모를 거쳐 종국에는 나에게로 향했다. 밀려온 파도에 온몸이 젖은 채 방향을 잃고 정처 없이 떠다녔다. 당장 그 물속으로 잠기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다시 반복되는 악몽 속에 들어왔음을 인정하느니 이대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심연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거식증 자가치료 시작 후 5년이 흘렀다. 폭식증이 시작되고는 이대로 먹는 게 맞는 건지 매끼마다 흔들렸다. 먹기 시작하면 더 이상 한입도 넣지 못할 만큼 음식을 먹고 가스활명수를 달고 살았다. 울면서 목까지 찬 음식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불안하고 두려웠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식사가 치료가 되었다. 눈앞에 음식들이 무서운 건지, 그 뒤로 숨겨둔 상처가 두려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땐 한껏 울음을 토해낸 뒤에야 먹기 시작했다. 특별히 치료랄 것도 없었던 게 음식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음식으로서 올바르게 먹고 멈추는 방법을 찾아가는 게 전부였다.  


솔직히 털어놓겠다. 사실 나는 여전히 폭식을 한다. 마음이 불안해서 눈앞의 현실이 두려워서 먹는 걸 멈추는 게 쉽지 않다. 음식을 음식으로만 대하기 어렵다. 나아졌지만 무너지는 순간이 더 많다.

전처럼 음식물이 목 끝까지 가득 차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은 아니지만 밥을 먹고도 단것과 자극적인 간식들을 계속 찾게 된다. 씹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한 기분에 속아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돌아서면 후회할 걸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가장 힘들 걸 알기에 요즘엔 먹더라도 속이 아프지 않게 멈추고, 먹고 나서 자책하기보다 다른 방법으로 소화시키려 노력한다. 땀 흘리게 운동을 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아이와 함께 한 번 더 눈을 맞추고 상담을 받고 글을 쓴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한 발짝 떨어져 왜 이렇게 먹게 되었는지, 어떤 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슬펐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때로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하나 분명한 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식증도, 폭식증도 모두 같은 마음의 병이고 이 병에 완치란 없다. 그래도 나아지려 노력하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 정도가 약해지고 빈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알려 애쓰는 시간 동안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쩌면 힘들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먹은 것들이니 미워하기보다 고마워해야 했다. 순간이나마 괜찮아졌다면 음식을 먹는다는 자체보다 의미 있는 행위였다 믿는다. 5년에 걸쳐 섭식장애와 치열하게 싸우며 얻어낸 것은 이게 전부였다.


나의 치료에 끝은 없다. 그저 덜 아프게, 더 맛있게 음미하며 음식을 먹고 그것이 행복하다는 걸 앞으로도 경험으로 쌓아가면 되는 거였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을 거다. 무너지는 날에도 끊임없이 괜찮다고 나에게 말해줘야겠다. 더디지만 분명 나는 조금씩 나아졌고 지금도 나아지고 있다.

미련할지 몰라도 나는 이런 내 모습이 괜찮다. 이제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나를 마주한다.

결국엔 음식도, 상처도 모두 내가 소화시켜야 할 것들이다.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던 우리의 웨딩사진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을 줄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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