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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 Mar 06. 2023

29kg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2

18. 나는 내가 다 나은 줄 알았다

부산 신혼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결혼식은 무기한으로 미뤄졌다.

그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그가 부대로 출근을 하면 그때부터 온전히 홀로 보내는 시간이었다. 함께 먹을 저녁을 준비하며 집안일을 하고, 군마트를 구경하기도 하고 공원을 걷기도 했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처음 몇 달간은 혼자 있으면 습관처럼 폭식을 했다. 군마트에서 천원돈으로 산 식빵 한 봉지와 과자를 모조리 먹어치우기도, 가전가구 설치기사님들이 집안을 오가는 동안에도 커다란 아몬드 한 통을 금세 씹어 먹었다.


외로움은 불쑥 나를 찾았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그가 당직 근무인 날에는 불을 환하게 켜놓은 신혼 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와 대화를 통해 아이를 가져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원래의 계획보다는 앞당겨진 시기였지만 함께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임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신 테스트기로 3주 차에 일찍 알게 된 임신 소식을 알리자 그는 적잖이 놀란 듯했다.

이제 막 결심을 했기에 나 또한 조금 놀라고 기쁘면서도 두려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무월경을 회복하고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한 생명을 품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폭식이 낮 시간 동안 이어졌고 여전히 힘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군인 신분인 그에게는 외출과 이동이 제한되었고 때때로 확진자가 생겨 집에 오지 못했다.

임신 초기 친정에서 보낸 일주일을 제외하곤 막달이 될 때까지 거의 집안에서 머물렀다.

다행인지 임신 후로 이렇다 할 폭식은 하지 않았다.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간단한 끼니와 컵라면 등으로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지만 저녁만큼은 그와 함께 양질의 음식을 건강하게 먹기 위해 노력했다. 몇 년 만에 본 최고 몸무게에서 임신이 되었고 오히려 임신 막달까지 꾸준히 조금씩 체중이 빠지며 유지되었다.


아기와 나 모두 건강하게 제왕절개 수술을 마쳤다.

아이의 생후 2개월 만인 2020년 12월 갑작스레 그의 전출이 결정되었다.

새해를 한주 앞두고 우리는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이사 준비를 끝내야 했다.

이제 막 신생아를 벗어난 아기를 데리고 부산에서 대구로의 이사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낯선 곳에서 또다시 새로운 낯선 곳으로의 이동이었다.




내게 이사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어릴 적부터 언니의 학교생활, 입시, 병원 위치 등의 문제들로 수없이 많은 이사를 겪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3번, 중학교 시절 2번의 이사를 겪었다. 거기에 2번의 전학도 따라왔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언니는 6학년이었고 무리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부모님은 언니의 전학을 위해 먼 동네로 이사를 결정했고, 나는 2년 동안 등하교를 위해 아빠 차로 30분이 넘는 거리를 오갔다. 아침은 대부분 차 안에서 먹는 작은 컵라면이었다. 언니는 전학을 갔음에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 시절 어렸던 내가 알기론 그랬다.  


그 무렵 언니는 하교한 나를 데리고 매일같이 영화를 보러 가거나 번화가로 나가 놀았다.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도 하고, 나가고 싶지 않은 날에도 언니와 함께 놀러 다녔다. 그게 언니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매일 매 순간 언니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쉼 없이 일을 했고 그때 언니에게는 나뿐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언니의 치료를 위해 유명한 상담 센터가 있는 수원으로 이사를 갔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언니는 자퇴를 했고 갑작스러운 언니의 중국 유학 선언에 아빠가 골프채를 들고 크게 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동하며 자연스레 나는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가 끝나며 전학이 결정되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이미 각각 무리를 지어 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다. 반에서 나만 혼자였다.

담임선생님은 전학생 롤링페이퍼를 돌려 아이들과 거리를 좁히려 하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몇 조롱 섞인 말들이 쓰여 있었다. 옆자리 아이에게 들킬까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며 책상 아래 서랍으로 황급히 롤링페이퍼를 구겨 넣어버린 일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그 뒤로 나는 반에서 공부 잘하는 전학생이 되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지만 반 아이들 중 누가 썼을지 모를 그 말들은 한 학기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 무렵 언니는 치료에 진전이 없어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했고 엄마가 상주 보호자로 함께 떠났다. 전학 간 학교에서의 적응과 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아무도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날 즈음 또다시 수원에서 서울로의 이사가 결정되었다. 언니의 대학 입시 준비와 병원 진료가 이유였다. 그즈음 중학교에 올라가 같은 반에서 처음으로 친해진 무리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미역국을 먹자 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무슨 일 있냐 묻는 엄마에게 여느 때와 같이 별일 아니라며 넘겼다. 엄마는 나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어떠한 티도 내지 않고 다른 무리의 친구들을 사귀었다. 추후에 가해자를 제외한 아이들에게 사과를 받긴 했지만 용서하지 못했다. 괜찮은 척 행동했지만 마음이 무너졌다. 어디에 있어도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적당히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범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가 점차 익숙해졌다.


그나마 어떻게 쟁취한 자리인데 잃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든 내 것이 아니라면 이미 익숙해진 이곳이 가장 낫다 생각했다. 또 다른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할 용기도, 친구라는 이름의 언제 깨질지 모를 관계에 마음을 쓸 힘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말을 부모님에게 꺼내었다. 이번에는 결코 이사와 전학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언니가 여행을 간 틈을 타 속마음을 전하며 어쩔 수 없다는 엄마의 대답에 난생처음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도 똑같은 딸인데 제발 한 번쯤 생각해 줄 수 없냐는 간절한 애원에도 부모님은 당장 눈앞에 놓인 아픈 아이가 먼저였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사와 전학은 강행되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반복되는 악몽 같았다.




가족과 이사는 내게 항상 참고 이해하며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울에 와 원하던 대학에 입학한 언니는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를 했다. 그러고는 그토록 원했던 중국으로 떠났다.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울거나 먹거나 화를 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화는 때때로 부모님을 넘어 어린 나에게도 향했다. 한겨울 베란다에 갇혀 추위에 벌벌 떨 때에도, 어두운 화장실에 갇혀 두려움에 떨 때에도 나의 부모는 도와주지 않았다. 학대와 방관의 기억을 안고 나는 더욱 착한 아이의 가면으로 내 안의 끔찍한 상처를 숨겼다. 부모에게 기쁨이 되려 노력했다.

"너까지 엇나가면 엄마는 살 수 없어. 우리 막내딸 믿고 살아. “

엄마는 늘 나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그렇게 나는 언니를 위해, 엄마를 위해 살았다.

평생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바람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마음의 응어리가 엉킨 실타래처럼 꼬이고 꼬여 더는 풀고 싶은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모습은 마음 안에서 나를 조각냈다. 그건 내가 거식증을 앓기 전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고, 나조차 부정했던 나였다.

어쩌면 내게 부산에서 대구로의 이사는 그저 이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텅 빈 부산 신혼집에 하나씩 들어온 가구와 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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