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아 Mar 03. 2023

29kg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1

17. 재발과 다시 시작한 치료, 의지와 의존의 차이

이상하게 그에게는 창피함도 모르고 자꾸만 속마음을 꺼내게 되었다. 그는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내게 매일매일 달려와 괜찮다 해줬고, 살쪄도 여전히 나는 나일뿐 더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겉모습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봐주고,

한없이 예쁘다 말해주고, 극도로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게 자신도 같이 살을 찌우겠다 약속까지 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폭식이 점점 심해지자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 매일 세끼를 함께 먹으러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연애를 시작하고도 불안은 내 발목을 잡았다. 끊임없이 그의 마음이 변할까 나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다.

나의 부모도, 나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모습들이 불쑥 튀어나올까 조심스러웠다.

그에게조차 착한 사람, 좋은 연인이고자 노력했다.

음식에만 미친 사람처럼 먹고 또 먹고, 폭식을 한 날에는 그와 만날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라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숫자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괴로워했다. 2년이 넘는 무월경에도 20킬로가 찌자 어느 날엔 피가 잠깐 비치었다.

그는 나를 돌보며 직업군인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음 해 2월 학사장교로 합격해 훈련소에 3개월 동안 입소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그에게 의존했고 그가 없는 하루는 내게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가 떠나고 필라테스 강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몰두할 게 필요했다.

그렇게 다시 거식증이 재발했고, 그가 없는 3개월 동안 다시 체중이 20킬로 가까이 빠졌다.




처음과는 다르게 더 빨리 악화되고 있음을 느끼며 스스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6월이 되어 그의 임관식 전날, 3개월 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던 밥을 먹었다.

도무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로 그를 보러 갈 자신이 없었다.

그날부터 다시 폭식증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32킬로의 몸으로 그를 축하하러 먼 길을 떠났다. 그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차를 얻어 타고 진주로 내려가는 3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자꾸 기운이 떨어져 뒷좌석에서 준비해 주신 빵과 직접 싸 온 간식들을 틈틈이 먹었다.


임관식이 끝나고 열심히 그와 그의 부모님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

내가 찍은 영상 속 그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로 나를 보며 쉰 목소리로 걱정을 드러냈다.

"어제부터 많이 먹은 거야."

나는 더욱 씩씩한 목소리로 밝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의 임관과 함께 다시 치료를 마음먹었다. 

누구의 설득도 아닌 나의 의지였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마름이나 목표가 아닌 사랑하는 이들과의 행복한 매일을 선택하려 노력했다.


재발 후 치료를 다짐하고,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2개월 만에 20킬로가 넘게 체중이 올랐고 드디어 2년 동안 멈추었던 생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배부름을 느끼면 위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음식량을 조절하려 해 봐도 잘되지 않았다. 증량도 멈추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을 찍자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또다시 치료를 시작하며 부모님과의 관계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사실 재발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다시 체중이 내려가는 나를 보며 나무랐다.

아빠 또한 필라테스 자격증 수업에 태워다 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애만 태웠다고 하셨다.   

두 번의 거식증과 치료 과정에서 가장 가슴을 졸이고 고생한 건 부모님이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1년이 넘게 매주 병원에 함께 데려가 어떻게 하면 나아질까 애를 쓰고, 내게 애원하고, 싸우고, 함께 울기도 하며 오랜 상처를 보듬어주려 뒤늦게나마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계셨다.

그동안 꽁꽁 묻어두었던 내 안의 상처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망으로 부모님께 쏟아졌고 우리는 오래 미뤄둔 각자의 몫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부모님과 나는 서로에게 너무 지쳐있었다. 한집에서 부딪히며 쌓여있던 각자의 감정들에 날이 설 때면 무섭게 서로를 공격했다. 가을이 오면 또 한 번 방학을 맞은 언니도 집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몸무게가 바닥을 찍었을 때 언니에게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언니는 자신이 선택한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운다고 엄마는 전했다. 벌써 몇 년째 반복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버티기 힘들어 중국으로 떠난 언니는 그곳에서도 매번 조금의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을 닦달해 비행기 표를 끊어 도중에 돌아오곤 했다. 여전히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하며 엄마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일방적으로 내게 풀었다.


이 상처를 극복하고 병에서 벗어났을 때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라왔다.

아픈 와중에도 일기를 쓰고 최악의 상황에서 사진을 남겨 기록했다.

그 사진 중에 하나를 언니에게 보냈다.

나는 사실 이만큼 힘들었다고, 밑바닥까지 왔지만 다시 죽을 각오로 살아보겠다고. 그러니 언니도 최선을 다해 버티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바라고 보낸 문자는 아니었다. 그저 나도 너만큼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는 미련하게 참고 버티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언니에게 단 한 문장으로 답장이 왔다.

"그래서 그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거니?"

그날, 나는 언니의 존재를 지웠다.

더는 가족으로서, 한 사람으로서도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언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체중이 줄어도, 늘어도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때의 나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더 이상 이 집에서 하루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가족만 없다면 어떻게든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모님과 대화를 할수록 싸움은 커졌다. 간절히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지만 정작 상처를 준 사람과는 마주하기 두려웠다. 벗어날 수 있다면 회피해버리고 싶었다.


그의 임관 후 한 달이 지나고 우리는 약속했던 혼인신고를 부모의 허락 없이 마쳤다. 그가 특기학교 기간이 끝나면 배정받는 지역의 관사로 함께 들어갈 예정이었다.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면 감정의 요동이나 식이조절도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 또한 가정을 꾸려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에서의 두려움이나 그가 가진 원래의 불안까지 안정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했지만 또 각자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결혼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봐도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급하게 잡은 양가 부모님들과의 상견례가 단출하게 마무리되었다. 결혼식은 차차 준비해서 올리기로 말이 나왔다. 예단과 예물 같은 건 따로 하고 싶지 않다는 우리의 의견에 양가 부모님도 동의해 주셨다. 우선 관사로 들어가 최소한의 신혼살림만 장만한 채 천천히 살면서 하나씩 늘려가기로 입을 모았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법적으로 부부가 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어느 주말에 그와 부산으로 향했다. 양가에서 챙겨 온 최소한의 짐과 작년 생일 부모님께 선물 받은 접이식 자전거를 짐칸에 겨우 실은 채 고속버스를 타고 우리는 서울을 떠났다.

2019년 나의 생일,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와 제대로 치료를 결심한 지 일 년이 되는 날 나는 다시 집을 떠나 가족으로부터 도망쳤다.





언니에게 보낸 사진은 사실 더 적나라하고 아팠다



이전 16화 스물둘, 폐경기 여성호르몬 수치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