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랑, 그 치유의 힘에 대하여
십 대 후반 문학특기생 입시 준비를 시작한 내게 무언가에 빗대어 자신을 표현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가재요"
나는 대답했다.
왜냐고 물었다.
"가재는 사람들에게 잡히면 자신의 집게발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도망간데요. 자신의 몸 일부를 버려가면서라도 도망칠 수밖에 없는 모습이 꼭 저 같아서요."
회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지 못하고 숨어버리는 것.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가장 나쁜 버릇이었다.
한때, 나는 회피도 용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착하지 않은 내 모습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늘 혼자 참는 게 익숙했고 괜찮은 줄 알았다.
어쩌면 그에게서 그런 나의 모습을 봤을지 모른다.
갈등 상황에서 대화를 피하는 그의 모습이 내 안에 있는 회피 성향과 닮아 더 싫었을까, 생각한다.
그와 나는 함께하며 사랑이 모든 걸 치유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잡고 있던 집게발을 놓았다.
더는 다치지 않기 위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서로가 전부가 되었던 관계를 끊고 끝끝내 도망쳤다.
우리의 헤어짐은 나에게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과 같았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경험은 모두 그가 처음이었다. 온 마음을 다 쏟아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나는 항상 그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나 또한 그에게 많은 걸 주었음을 깨달았다. 내게 그는 부모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의 전적인 신뢰는 그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불신으로 가득했던 내게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한 그와의 시간은 그 자체로 치유였고 앞으로의 단단한 거름이 되었다.
사랑의 경험은 나를 성장시켰고, 내 안의 큰 사랑을 일깨웠다. 그 사랑의 결실이자 책임인 우리의 아이와 나는 오늘도 사랑을 주고받는다.
나의 사랑은 어리고 서툴렀지만 그만큼 따뜻하고 행복했다. 그와 맞잡았던 손에는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을까 싶은 기억도 남았지만, 이보다 벅차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들려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혼 후 일 년이 흘렀지만 양육자로서 앞으로 혼자 아이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부족한 내가 이 아이를 마음이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혹여 딸아이와 함께할 시간 속에서 나의 아픔이 아이의 아픔이 될까 때로는 아이에게 아빠의 몫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28개월이 된 아이는 지치지 않는 무한 체력에 말이 느는 만큼 고집과 떼도 늘었다. 되도록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맞춰주려 노력해도 사실 쉽지만은 않다. 체력도 따라주지 않아 어느새 지쳐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한없이 서글퍼지곤 한다.
지난 공휴일, 아이와 함께 집 근처 키즈카페로 향했다. 싱글맘이 된 후로 공휴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그 속에는 한부모가정의 상대적 박탈감인지, 아빠와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 다름을 느낄 아이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온 힘을 다해 놀아주어야 했다.
볼 풀장, 트램펄린, 소꿉놀이 등등 얼마나 곳곳을 뛰어다녔을까. 낮잠 시간이 되어서야 아이는 체력이 방전되었다. 이미 내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롯데리아에서 늦은 점심을 먹다 잠이 든 아이를 안고, 아이 짐가방까지 드니 온몸이 물에 젖은 솜 같았다. 급히 눈앞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생각했다.
‘기념일 따위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하루만 나로 온전히 쉬고 싶다.'
매일 바라던 것이었지만 막상 홀로 보내는 시간이 오면 가장 못 견뎌하는 건 나였다.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잠에서 깬 아이가 다가왔다. 빨간색 체리 자수가 새겨진 애착이불을 들고 와 내게 덮어주며 아이는 말했다.
“엄마, 아프니까 붕대 감아줄게. 이제 다 나았어.”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져 아이를 품에 꼭 껴안았다.
힘든 순간에도 아이를 생각하면 강해진다. 아이를 키우며 나 또한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를 이토록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며 내 안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는다.
동시에 절망과 슬픔 등 복합적인 여러 감정들도 함께 느낀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사랑이 모든 걸 치유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를 만나 사랑 안에서 기쁨과 아픔을 배웠다. 비로소 내 안의 상처를 마주 볼 용기도 내었다. 이 모든 과정이 치유였음을 깨닫는다. 그와 헤어지고도 나는 사랑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