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안이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왜 늘 불안함을 느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가슴 벅차게 행복한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안정감으로 충만한 상황에서까지 나는 왜 또다시 불안으로 빠졌던 걸까. 알 수 없는 내 안의 불안을 감당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써버렸다.
어쩌면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마지막에 그가 말했듯 그냥 우울한 인간이라서 이렇게 된 걸까.
한참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자기혐오의 늪에서 눈물만 흘리던 나날이 있었다.
나조차 스스로를 트라우마와 우울로 점철된 삶이라 여겼다.
지금껏 다른 이에게서 나의 존재를 찾았다.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알맹이는 빼놓은 채 그럴듯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살아왔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면 나 또한 나를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엄마도 그도 갈등이 생기면 자신의 감정을 인식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없는 그 부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내가 차분하게 힘든 감정을 정리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반응이 없고 그 마음을 몰라주었다. 매번 무시받고 거절당하는 절망을 느꼈다.
그들은 자기감정을 인식 못하지만 결국 그 감정의 파동을 불안으로 느낀 취약한 불안형인 내가 대신 터트리는 거였다. 그러고 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소위 말하는 미친년이 되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파동에 영향을 받아 감정을 더 크게 부풀려 터트리고 마치 내가 아닌 거 같은 상실을 느끼며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상대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고 나도 이런 사람이었다.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의 서로를 사랑했고,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점점 살이 쪄가는 내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휩싸여 그에게 버릇처럼 물었다.
"내가 이대로 70, 80, 100킬로가 되어도 나를 사랑할 거야?"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화장을 하지 않고 그를 만나러 나갔을 때도,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 눈물이 범벅된 채로 나가도 그는 늘 괜찮다고 말해줬다.
섭식장애 치료 과정에서 부모님에게 미친 듯 감정을 터트리며 보였던 내 칼춤까지도 그는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살을 빼기 전과 후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에 이골이 나있던 내게 예쁘다는 말도 몇 번을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표현하던 그였다.
그가 훈련소에 있을 당시 짧은 휴가를 나왔던 날이 떠오른다. 다이어트 전, 입시 후 70킬로를 훌쩍 넘겨 최고 몸무게를 찍었을 당시부터 거식증으로 가기까지 사진을 쭉 보여주자 그는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짓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말하고는 다시 말라가던 나를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툭 튀어나온 날개뼈를 토닥이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임관식까지 살 더 빠지면 안 돼. 제발 조금만 먹자."
그날, 그의 눈물 맺힌 눈동자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시큰하다.
임신 전 결혼 기간 동안 68킬로까지 체중이 늘었다.
아무리 살이 쪄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몸무게가 늘수록 불안은 커졌지만 그와의 사랑 또한 커졌다. 참 아이러니했다.
나의 사랑은 신뢰에서 시작된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함께하며 나는 나 자신보다도 상대를 믿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사람의 모습은 내가 믿고 싶은 부분이 전부가 아니란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갈등을 겪으며 믿음이 깨지고 깨지다 못해 관계의 신뢰가 깨지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 생각했다.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내 탓을 했다.
나 자신을 먼저 믿고 신뢰했다면 달라졌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빈껍데기뿐인 나와 마주했다.
이제는 누구보다 나를 신뢰할 것이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다.
우리가 서로를 놓은 이유를 수없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혼자서 정확히 다 파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글을 쓰며 차근차근 되돌아보니 갈등 상황에 화가 나서, 회피하기 위해 또는 상처주려 그가 남겼던 말들이 모두 진심은 아니었음을 이제 와 알 것도 같다.
내가 아닌 상대에게서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찾으려 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지쳤을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러니 내가 일어서 나아지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만 고마움으로 안고 나는 다시 나아가겠다.
나의 불안은 병이 아니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존재였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알게 되었다.
항상 극과 극의 팽팽한 상태만 오갔던 내게 안정된 상태는 불안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가 오히려 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불안을 즐겁게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내가 얼마만큼 힘들고, 또 얼마나 기뻐야 양극으로 가는지를 알아갈 앞으로가 조금은 기대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안은 여전히 내게 말을 걸어온다.
안간힘을 쓴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행복도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듯.
지금 이 순간에 소소하게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들에 집중하고 누리면 되는 거였다.
섭식장애와 이혼을 겪으며 나를 잃어버렸다 생각했다. 정작 진짜 나와는 마주한 적이 없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그저 나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잠시 방향을 잘못 들어 헤맨 것뿐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나에게, 불안을 불안해하던 내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꼭 안아주고 싶다.
굳이 행복해지려, 불안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넣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줄 것이다.
나만의 정상 범주, 즉 불안이 공존하는 안정된 상태를 찾아가는 힘이 내게도 생겼다.
내가 나를 알아야 힘이 생기고, 그 힘은 자존감을 키워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든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