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트기 훨씬 전이지만 집 앞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걱정한 대로 눈이 밤새 기척 없이 내려 도로를 살짝 덮었다. 하지만 쌓인 눈의 양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지 팥죽을 끓이기 위해 이른 7시에 만나기로 한 도반과의 약속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산사 길이 막히니 법회 시간도 늦춰지게 되었다.
오늘같이 눈 오는 날이면 가족은 절에 올라가는 길을 트기 위해 제설 작업을 한다. 입구에서 약 2킬로의 산사 길을 5년 동안 도맡아 하던 것을 지난해부터 좋은 분과 함께 하게 되었다. 대형 엔진 송풍기로 하는 작업이라서, 비교적 적은 양의 눈으로 보아 한두 시간이면 끝나리라 예상했다.
아침 7시. 아주 가는 눈송이가 물 제비 만들려는 사금파리처럼 허리를 굽히며 날리고 있다. 여전히 새벽하늘조차 침침하게 검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멀리 읍내에 둥글게 모여있는 휘황한 불빛들만 아궁이 숯불처럼 붉게 타고 있었다. 눈발만 잦아든다면 제설 작업은 시작될 것이고, 두 시간 후면 가마솥에서는 팥죽이 끓고 있을 것이다. 곧 서서히 눈발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남자 두 사람은 서둘러 대형 엔진 송풍기를 어깨에 멨다. 마치 전사들처럼 눈을 하늘로 뿌리고 길을 내기 시작했다. 나도 무엇이든 도움이 돼야겠기에 기름통을 들고 제설 작업한 길을 따라 올라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가족을 따라 제설이나, 제초 작업할 때 뒤 따라다니며 보조한 경력이 오늘도 충분히 발휘하게 되었다. 이런 일도 이미 익숙해져서 가족이 움직일 땐, 간식을 준비하고 기름통을 들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무거운 송풍기를 매고 장시간 무심히 눈을 불어내며 힘쓰는 사람에 비하면 그깟 비교할 것도 못 되지만, 기름통을 중간 거리까지 옮겨다 놓으면 절반의 힘을 덜 수 있다. 또 작업하는 것을 보면 쉬지 않고 무리하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강제로 멈추게 해서 따뜻한 음료나 간식을 입어 넣어 준다.
마스크 써서 대부분 가린 얼굴이지만 눈을 크게 뜨고 못마땅한 빛이 역력하다. 하지만 억지로 쉬면서도 찡끗 웃는 것 보면 은근히 좋아하는 것도 있다. 짧은 시간 잠시 쉬어 가야 그 긴 거리를 몸 상하지 않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으니, 적당히 제어할 보조가 필요한 이유다. 아무리 사소한 역할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드라마의 주인공보다 보조 연기자의 맛깔나는 연기가 더 좋은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작업하러 올라가고 30분가량 지나면서 눈발이 점점 굵고 거세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보라가 더 세게 치더니 가까이 보이던 산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타임머신 타고 온통 하얀 세상 겨울 왕국의 한가운데 와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마치 엘사가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은 생각이 스쳐 가다니.
영하의 기온이 아니라서 제설 작업하기엔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폭설은 기온이 높아지면 무거워져서 수십 배의 힘이 들어간다. 영상 기온 탓에 감행하려던 제설 작업은 결국 철수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작업했던 길은 처음의 모습처럼 아무 일 없이 고요하게 내리는 눈을 받고 있었다.
눈은 11시까지로 예보됐으나 예상보다 빨리 그쳤다. 약 30분 정도 휘몰아치던 눈은 사그라지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참에 눈 덮인 산길을 나도 한 번 걸어 보기로 했다. 때마침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젊은 도반과 함께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다시 기름통을 들고 씩씩하게.
약 2킬로의 산길을 더군다나 눈길을 밟고 올라가기는 쉽지 않다. 무심히 걷기에만 집중하며 부지런히 올라갔다. 생각보다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다. 차량 통행이 쉽도록 길 가운데로 밟고 올라가면 제설 작업할 때 도움이 된다. 일부러는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동짓날, 어려움은 있었지만, 폭설이 내린 눈길을 밟으며 눈길 걷기 명상도 적극 권할 만 했다. 다음 눈 오는 날은 마음먹고 제대로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니 기다려진다.
절 입구에 거의 다다를 때쯤이면 법당 위로 펼쳐진 주흘산 주봉이 손에 닿을 듯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주흘산은 소백산의 중심을 이루고 이곳 문경새재의 주산이기도 하다.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라고 하는 한자 뜻을 가진 주흘산은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으로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러운 영산으로 받들어 왔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 백과>
이러한 영험을 느끼고 있는 주지 스님은 동짓날이면 정성껏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올리고, 조상님들과 더 나아가 국가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예를 지켜오고 계신다. 동짓날에 만드는 팥죽은 팥의 붉은색이 잡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악귀를 물리치므로 평안을 기원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보다 출처도 모르는 외국 문화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깊게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동지 같은 전통 풍습은 조상님들의 지혜로 오랫동안 풍습으로 이어진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며, 앞으로도 선명하게 지켜져야 할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동지는 이십사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음양의 조화를 통해 삶의 순환을 깨닫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깊은 의미가 있는 날이다.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는 동지를 '작은 새해'로 여겼다고 한다. 올해는 <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오후 6시 21분>을 지나면서 새해가 된 셈이다. 우리 절에서도 새해를 준비하는 의미로 정성껏 팥죽을 쑤어 부처님과 조상님께 올리고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마치면 미리 제작한 새해의 달력을 직접 나눠주신다.
동짓날 폭설이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눈길을 무릅쓰고 절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엔, 조금 늦더라도 팥죽을 끓여서 올리는 전통 풍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동지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담겼기도 한다.
우리 어머니께서 해마다 절에서 나눠 주시는 팥죽을 드시면서도 굳이 어머니 손으로 힘들게 팥죽을 끓이신다. 가까이 있는 우리에게도 건강 무탈을 기원하며 손수 장만하시고 챙겨주신다. 한편으로는 윗대에서 물려주신 좋은 전통문화를 이어가시면서 맏며느리인 나에게도 쭉 이어지길 기대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고 지금도 배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