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어떤 일로 왔어요? 처음 온 거예요?"
"네, 이번이 처음이에요. 공부하러 왔어요, 유학이요."
그는 정막 했던 차 안 분위기를 깨고 나에게 여러 질문들을 했다. 스몰토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그의 질문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무얼 공부하냐, 어느 학교를 다니냐, 학사를 공부하냐 석사를 공부하냐 등등을 물어봤다. 이렇게 보니 그가 나를 취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낯선 이의 질문은 나에게 언제나 환영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자 나는 그가 궁금해졌고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여러 질문들을 하였다.
그는 파키스탄 사람이었고 영국으로 이주해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 택시 기사 생활을 오래 했으며 그에게는 자녀 두 명이 있고 모두 다 영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파키스탄 사람인 걸 알자 나는 내 파키스탄 친구 한 명이 떠올라 그에게 말하였다.
"아...! 내 친구 중에 파키스탄 친구 한 명이 있어요. 걔는 나랑 같은 학교인데 법학을 공부해요."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스몰토크를 위해 내가 아는 사람 한 명을 이용해 먹었다. 나의 외향적 성향의 경험상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동질감이나 교집합 정도는 있어줘야 했다. '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라고 생각에 빠질 때쯤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에 파키스탄 사람들이 꽤 많다고 말해주었다.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영국으로 이민 또는 공부를 하러 온다고 하였다. 이때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정말 영국에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적어도 내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파키스탄,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 또는 그쪽 출신 사람들이 많았다. 영국에 다양한 나라의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건 얼추 알고 있었는데
영국에 오래 산 이민자에게 그 얘기를 들으니 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방금 막 영국에 도착한 나보다 영국으로 이민 와서 10년 넘게 거주하고 경제활동을 한 그가 나보다 훨씬 영국에 대해서 잘 알게 뻔했기에 내가 영국에 대해 품고 있던 수많은 궁금증들을 그에게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난 그에게 영국의 (브렉시트, 코로나와 연결지은) 경제상황, 왕실가족, 정치 및 의료 체계 등등을 물어보았고(아... 물론 한 번에 한 질문씩 물어보았다. 말 많고 귀찮은 한국인 승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 그는 나에게 아주 친절히 그리고 가끔씩은 열변을 토하며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한 시간 반동안
각자에게 아주 흥미로운 주제들로 대화를 꽃피웠다. 정말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향연이었다.
사실 영국에 도착해서 나누는 누군가와의 대화가 이렇게 잘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친절함에 그리고 나를 그저 낯선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아 준 그의 태도에 감사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가고 있었고 그는 나에게
" 사실 내가 그동안 많은 유학생들을 승객으로 태워봤지만 그들은 대게 말이 없어. 특히나 중국 유학생들이 많아서 자주 태우지만 항상 조용하지. 내 중국인 친구만 해도 내 옆에 태우면 말이 없다고, (그는 탐탁지 않다는 듯 한 손을 들어 휘 휘저으며 말했다.) 대화를 해도 말이야 항상 단답이야. "
그의 말에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가 왠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만족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우리는 정확한 하차 장소를 찾고 있었다.
"여기 맞나...? 여기 어디 근처인 것 같은데 "
"엄... 그런가..? 잘 모르겠어..."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나도 처음 와보는 장소였으니까. 처음 보는 주소에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 딸랑 영어로 적힌 주소 하나 들고는 택시 타고 온 건데 그는 내 기숙사 주소니까 내가 잘 알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정확히... 몰랐다.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연신 영어로 된 낯선 표지판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백미러로 나의 난감한 표정을 읽었는지 나의 목적지 일 것 같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뒷 좌석에 탄 나를 보며 말하였다.
" Don't be afraid "
( "두려워하지 마" )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혹시 기숙사 전화번호 알아?"
그는 나에게 기숙사 데스크 전화번호를 물었고 나는 미리 저장해 둔 기숙사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당장 나의 상황을 설명해야 했는데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내 휴대폰을 가져가서는 상황을 설명했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알맞은 장소에 잘 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화로 알아낸 그는 휴대폰을 나에게 돌려주고는 말했다.
" 바로 저 건물이래, 저기로 들어가면 돼. "
" 그리고 내 번호랑 이름 저장해 둬. 나중에 택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고 "
그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나의 짐들을 트렁크에서 꺼내 기숙사 건물까지 옮겨주었다. (나도 그를 따라서 택시에서 내리는데 생각해 보니 난 분명 뒷좌석 왼쪽, 정확히는 왼쪽 창문 옆 좌석에 앉아있었는데 내릴 때 보니 어느새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고는 그는 내가 데스크에서 수속 절차 밟는 것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인사를 하고 아주 쿨하게 떠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쿨하게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영국에 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저런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하다고. 그의 이름과 함께 저장된 그의 번호는 아직도 내 연락처에 고이 저장되어 있다.
가끔 그가 떠오르면 생각한다. 과연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그의 친절함과 선의를 나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기에. 어쩌면 그는 나와의 대화에 만족해서 나에게 친절을 베푼 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되었든 그가 베푼 작은 선의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에게 아직도 좋은 기억의 일부분으로 남아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추억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하다.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건 계속 계속 꺼내 읽어보고 싶은 따뜻한 편지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