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단 한 번....

상실과 그리움의 테마 에세이

by 정하

안개의 강

그 여울목을 지나갈 때

구비치고 일렁이던 마음들,


아득한 환시,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손끝에서 흩어지던 그리움


그 그리움을 노를 삼아

막막한 생을 젓다보면


어느덧

진초록의 언덕에 닿을 수 있으려나


그때는

희열의 언어가 뿌리내려

푸른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숲길이 두 갈래로 열리려나

-강을 건너는 중-



스무 살의 여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할 만큼 순도 높은 황홀경을 보았다.
그건, 판타스틱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신의 은밀한 선물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첫 여름,
여고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예고도 없이 내 고향에 찾아왔다.
내가 00에 산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우리 고향의 첫 ‘4년제 여자대학생’이라는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그 허술한 정보 몇 개만 들고서 무작정 먼 길을 온 것이었다.

그 설렘의 도전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친구와 함께 조각배를 타고 고향 근처의 술숲과 모래사장, 기암괴석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유명한 작은 섬으로 놀러갔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지만,
그 시절 그 섬은 세상 눈에 많이 드러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바람 부는 솔숲을 거닐고 반달 모양의 모래사장에서 즐겁게 뛰놀다가 시간에 맞춰
우리를 데리러 온 조각배에 올랐을 때,
바다는 갑자기 소리 없이 물안개로 뒤덮였다.
한순간에 우리는 반투명한 장막에 갇히고 세상은 망망대해처럼 아득해졌다.
노 젓는 소리만 삐걱, 삐걱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려왔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머리 위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둥실 떠올랐다.
안개를 뚫고 스며든 미세한 햇살이
우리를 위해 펼쳐준 기적이었다.

그건 풍경의 착시도, 자연의 우연도 아니었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세상은 어떤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 번,
마음에 평생 머물 기적 같은 장면을 선물한다는 것을.
나는 벅찬 감동으로, 그 친구는 희열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두 손을 잡았다.
친구는 말했다.
“너희 집에 오길 정말 잘했어… 너무 멋있다.”

그날 이후,
그 무지개의 빛은
내 언어의 첫 샘물이 되었고

안개의 바다는 오래도록 내 영혼의 자양분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은 같은 추억을 가진 우리를 각자 다른 먼 길로 데려갔고
서로 바빠져 연락도 어느 순간 끊어지게 되었다.
뒤늦게 다시 찾았을 때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믿었다.
한 하늘 아래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믿음은 안개의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친구의 부재는 한쪽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홀로 남은 나의 침상에는 안개의 바다가 밀려오곤 한다.

아득한 환시,
손끝에서 스르르 흩어지는 그리움.
가닿을 수 없으면서도
가만히 찾아오는 슬픔.

나는 그때 알았다.

상실이 남긴 그리움,
그리움이 품은 투명한 빛,
그 빛을 향해 다시 노를 젓고 싶은 마음
그것이 나의 문학의 원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나는
잃어버린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그 여름의 바다를 부르듯,
놓쳐버린 나 자신에게 돌아가듯
글을 쓰고 있다.

문학은
상실을 품은 나에게 건네는 조용한 손짓이며,
흐려진 기억을 맑히는 의식이고,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일으키는 빛이다.

그 여름,
안개 위로 떠오른 무지개는
지금도 내 글의 심장처럼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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