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치유의 감성 테마시
라흐마니노프의 밤
20대의 패기와 열정으로 쓴 첫 악보는
초연의 밤,
박수 대신 차가운 혹평을 받았다.
그날 이후
그는 건반을 바라보지 못했다.
마음이 무너져
스스로가 깊은 어둠 속에 유폐되었다.
꿈은 접힌 악보처럼 구겨졌고
삶은 음을 잃은 채 흩어졌다.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같은 시간,
어둠의 방에는
햇살 한 줌 내리쬐지 못했고
바람만 매섭게 불어댔다.
칼바람은 심장을 마구 에이었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았다.
참아온 것들,
삼켜진 울음,
끝내 눌러 적지 못했던 마음의 소리들,
그는 혼신의 힘으로 다시 펜을 잡았다.
그것들이 마침내 악보가 되었고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세상에 나와
불세출의 명곡이 되었다.
송년의 밤, 민주마루 공연장에서
여고 동창 넷이
앞자리를 잡아
공연을 관람했다.
호리호리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자
오래 봉인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천 근 만 근 무게를 실은 손가락이
우주의 고뇌를 짚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 지휘자는 온몸으로 파도를 일으키고
피아니스트는 웅장한 선율로 바다를 불러와
우리는 의자에 앉은 채
거센 물살 위로 던져져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음악의 파고를 넘어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건반 위를 스치는 손끝이 느려지며
물결은 갑자기 깊이를 바꾸었다.
포효하던 바다는
한숨처럼 낮아졌고
어느새 우리는 감미롭고 고요한 호수에 도달했다.
건반 위에서 부드럽게 춤을 추는 손가락은
우주의 마법으로
파도의 격정을 잠재우고
꿈꾸는 듯한 서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두 거장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격정과 서정이
수시로 변하는 선율에 우리를 태워
우주로,
바다로,
그리고 호수를 거쳐
풀빛 들판으로 옮겼다
또 다시 격정의 멜로디로
우리를 격앙시키다가
어느 순간
지휘자의 강렬한 눈빛과 몸짓의
피날레 사인이 흐르자
무대는 일제히 암전이 되었다.
어마어마한 감동의 여운은
소리 없는 침묵으로
우리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세상의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긴 시간이었지만
암전되는 순간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격정적인 선율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뜨겁게 만났다.
브라보,
끝나지 않는 우뢰 같은 박수,
계속 이어지는 커튼콜—
어둠이 무대에 내려앉을 때
피아노는 비로소 긴 숨을 토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삶을
자기 몸으로 연주해 낸 뒤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맑은 눈매로 빈 무대를 바라봤다.
공연장을 나와서도
우리는 추위를 잊은 채
선연한 감동을 이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밤하늘에는
여윈 달 하나가
은은한 미소로
우리의 발밑을 비춰 주었다.
배경 이야기
교향악단 송년음악회 ‘윈터 랩소디’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연주되었습니다.
협연자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지휘자는 정한결
집에 돌아와 그 감동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음악이 지나간 자리에
언어로 한 땀 한 땀,
숨을 남겼습니다.
오늘 저는 좋은 음악을 단지 ‘감상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저의 삶의 결로 통과시켜
문장으로 환원한 사람이 되었네요.
오늘 밤의 라흐마니노프는
무대 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저의 언어 속에서
한 번 더 연주되었고
그 두 번째 연주는
저의 깊은 밤을 아주 포근히 감싸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