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매번 실제로 존재할 리 없는 통증으로 나를 뭉개버렸다.
한숨을 쉬며 북커버를 응시했다.
앞면과 뒷면 모두에 책을 읽으며 내쉬었던 숨이 묻어있다.
오늘도 쉽사리 책을 구석에 박아두지 못했다.
내가 잠시나마 몸을 맡겼던 세상이 이 안쪽에 똑똑히 존재함을 너무도 잘 아니까.
다른 사람들도 소설을 덮고 나서 나처럼 황망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완독후에 책을 덮으면 홀로 현실에 떨어져 충만함과 외로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냉온스런 감정들이 피부 표면에서 느껴지는 그 무거운 감각.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책의 가운데를 빗겨 펴냈다.
어딜 봐도 거기엔 내가 몸담았던 세상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책의 이름은 '끝없는 이야기'
한 글자, 한 글자. 이전보다 세심히 읽어 내려가던 도중 책 속의 어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만난 인물을 표현하는 말들을 빠짐없이 나열해 보자면
황금빛 눈을 한 모든 소원을 다루는 지배자이자 누구보다도 청렴한 흰색을 두른 자라고 거론될만하다고 내 눈이 앞서가서 정해 버릴 정도로 강하게 빛나는 여자다.
피어나는 꽃의 아치 가운데서 겹겹이 쌓인 쿠션에 몸을 받치고
폭신히 들어가는 부드러운 방석 위에서 둥근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얼굴의 중안부엔 아몬드 모양의 날카롭고도 동그란 눈속에선 선명한 황금빛깔이 물결쳤고
열 살도 채 넘기지 못한 듯한 조그마한 몸은 넓은 비단가운에 휩싸인 상태로
그 위로 살짝 드러난 목련꽃잎보다도 밝게 빛나는 피부와
매끄럽게 빗질되어 어깨를 타고 흐르는 머릿결은 마치 싸락눈처럼 빛을 반사했고 넓은 가운에 휘감겨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를 작은 몸에 함축시켜낸 그녀의 모습을 무심코 떠올리는 와중
이런 자들을 담은 책 속의 세계에 푹 빠진 한 소년이 나와 동시에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그 형상은 아마 내가 그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스티안.
바스티안에게 그녀가 말했다.
새로운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면 내 주변의 온 세상이 다시금 선명해질 것이리라.
그 말을 듣고 일순간 목 부근에 소름이 돋아나는 감각이 내리쳤다.
독자가 책에 빠져들게 되면 기어코 환상의 세계를 직접 그리게 될 거라고 이 책을 쓴 이는 내심 알고 있었다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그녀는 앞서가서 말했으며 내가 마치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모양새였지만
세상에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보는 자는 없기에
예측과 실현은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은 조금 뒤에 깨달았다.
어떤 뛰어나고 저명한 예언가가 어느 개인의 미래를 예언하였다고 한들
그 일들이 직접 몸으로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예언은 보기 좋게 바스러진다는 것.
일발필중의 예언이 정말 실존한다면 그것은 그의 한계를 확정지어 헛된 희망내지 절망을 미리 가져보는 체험을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개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전능한 신이 있다면 말이다.
앞으로의 내 행동에 그리 주목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이미 당신이 보았고 당신이 예측한 모든 미래를 꿰뚫기를 지망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어린 여왕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로 넘어온다면 그건 옳은 방향이란다. 우리에게 한번 도달했던 이들은 여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으로 하여 그들은 한차례 변화를 겪고 자신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지.
그들은 너희의 참모습을 보아서 덕분에 눈을 뜨게 되었단다. 그렇기에 이제 그들 자신의 세상과 주변의 타인들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단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거야.
이전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들에서 기적과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다시금 우리를 찾아 환상의 세계로 오길 자처한 것까지가 네가 아직까지 책을 읽는 이유란다."
이 말은 내게 있어서 종이로 이루어진, 단지 그뿐일 페이지의 단면일 텐데도
책이 닫히고 나서 오히려 주변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한 감각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이렇듯 환상의 세계는 우리의 말 한마디에 힘을 지니며 형태가 부여되어 당당하게 현실에 포함되나 싶었다.
언뜻 보기엔 글자의 집합에 불과한것이 이런 식으로 세상에 실존하게 되는건가.
그래서 나도, 또다른 누군가들도 이런 감각을 잊지못해 다음 세상을 계속 펼치길 원한다.
책이란 그런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