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살다
아침에 일어나면 텃밭 한 번 휘 둘러보는데 30분-1시간이다. 5월 초에 심어 놓았던 각종 야채들이 햇볕과 바람과 비와 흙의 힘으로 벌써 부지런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 오이는 매일 먹어도 주렁주렁 또 달리고, 가지도 빼꼼하게 달려 크고 있다. 가장 빨리 자란 것은 역시 각종 상추와 깻잎이다.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상추를 한아름씩 먹고 있다. 청상추, 적상추, 치커리 그리고 깻잎이 매일 싱싱하게 새잎을 내놓으며 빼곡하게 크고 있으니 어떻게든 먹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때때로 아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연한 채소들은 보관도 힘들고 그래서 나누어 먹기도 쉽지 않다. 텃밭에서 따자마자 깨끗이 씻어 먹으면 아삭아삭한 그 맛 때문에 한 달 동안 먹어도 질리지 않고 입을 즐겁게 한다.
여름 야채 중에서 나의 최애 야채는 고추이다. 사실 매운 것을 못 먹는 편이라 우리 집 고추는 전부 오이고추이다. 따자마자 식탁으로 올라오는 고추의 맛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수분이 꽉 차 있어 아삭 상큼한 고추를 쌈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여름 반찬으로 최고다. 가끔 식당에서 고추가 나와 먹어 보면 벌써 수분이 빠져 질깃해진 느낌이다. 누구에게든 밭에서 막 수확한 고추를 먹어보시라 권하고픈 마음이다. 이제 토마토가 달리고 있고, 애호박과 밤호박도 나오고.... 입이 더욱 바빠질 때이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밥은 최소한으로 먹고 있는데, 이렇게 풍성한 야채들 때문에 거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렇게 싱그러운 야채를 먹기 위해서는 몸이 조금 고생해야 한다. 벌써 무더위는 시작되었고 무더위와 함께 벌레들의 시간도 시작되었다. 모기는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바로 공격을 하고, 땅 밑을 지키던 개미들도 가끔 공격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모기에 물리면 유난스럽게 붓고 염증이 생기는 체질인 내가 이 여름을 벌레의 공격을 피해 안전하게 지내는 일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밭에 나갈 때는 무조건 긴 팔 옷을 장착하고, 얼굴과 머리는 양봉 모자 비슷하게 그물로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준비해 가린다.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살인 진드기에도 대비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양말까지 단단하게 챙겨 신는다. 이렇게 챙겨 입으면 거의 채소밭을 향해 가는 전사와 같다. 17년 차 텃밭 농사꾼이어서 이제 이 모든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방심해서 잠깐이니 괜찮겠지 하고 반팔에 맨다리를 내놓고 야채를 수확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어딘가 물리기 마련이다. 작은 텃밭이니 아무런 농약도 사용하지 않고 무농약으로 버티고 있는데 그러자니 잡초와 벌레들은 더욱 왕성하다. 하나를 얻자면 하나는 내주어야 하는 법인가 보다. 그래서 벌레와 싸우기보다는 점점 벌레에 대비하는 채비에 신경을 쓰게 되고, 농기구는 물론 농사 대비 의류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고작 텃밭 야채 수확을 위해 이렇게 유난을 떠는 나 자신을 보면, 정말 농사짓는 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새삼 느껴진다. 도시에서는 에어컨을 켜놓고도 헉헉대는 무더위인데, 농촌에서는 한낮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일하거나 때로는 한낮 뙤약볕 아래서 키운 야채를 가장 맛있을 때 수확해 내다 팔기 위해 고생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수고로움이 없다면 우리들의 밥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맛있는 채소를 수확하기 위한 이 더위의 수고로움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정말 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 더위가 만들어 내는 싱싱한 야채의 푸르름에 감사하며 이 여름도 느릿느릿 편안하게 그리고 안전하고 맛있게 지낼 준비를 해야겠다. 모두들 건강한 여름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