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기르기에서 길어 올린 깨달음
식물을 기르는 일에 도가 튼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푸른 손’이라는 귀여운 별명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반대로 키우는 식물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나 같은 손은 ‘붉은 손’이라고 해야 하려나. 동물만큼이나 식물도 애정한다. 생명체는 무엇이건 애정하는 쪽에 가깝다. 더군다나 번번이 실패를 경험하다 보니 식물을 잘 기른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도전정신이 늘 불타오르곤 했다.
최근 들어 깨달은 한 가지. 적당히 사랑할 것.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학교에서 식물을 가져온다. 씨앗을 가져올 때도 있고 제법 기른 식물을 집에서 마저 기르기 위해 가져올 때도 있다. 지금껏 집에 들어온 친구들은 이내 죽음을 맞았는데 한 화분은 남달랐다. 봉선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길을 빌어 씨앗까지 추출해 새로 화분에 심기에 이르렀다. 설마 싹을 틔우겠어?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초록빛 얼굴이 흙을 뚫고 인사를 건네던 그날의 환희란.
몹시 바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도록 화분에 시선을 둘 만한 여유가 없었다. 부엌 작은 유리창 앞에 화분을 놓아두었지만 매일 살뜰히 보살피지는 못했다. 드문드문 시선이 닿았을 때 화분의 흙이 메말라 보이면 적당량의 물을 살짝 적셔주었다. 나머지는 자연에 맡겼다. 창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살, 계절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온도에 기대어 길렀다.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바쁘게 준비를 하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그간 쑥쑥 자라는 줄기와 잎을 보며 기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가느다란 줄기 위로 하얀 꽃망울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호들갑스럽게 사진을 찍고 아이에게 자랑하듯 내밀어 보였다. 세상에,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그새 무럭무럭 자라 꽃을 틔웠다. 적당한 무관심과 느슨한 애정이 이 아이를 지금에 이르게 했다.
느슨한 애정. 지금껏 넘치는 사랑은 오히려 식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오히려 본연의 힘을 믿었던 적절한 관심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게 했는지도 모른다. 글쎄. 이것이 비단 식물을 기르는 데에만 적용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도, 연인도, 그 어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무 한 대상에만 몰두하기보다는 그것 본연의 잠재력을, 그것을 둘러싼 자연의 힘을 믿고 지켜봐 주는 일. 작은 식물 하나가 나에게 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