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 쓰는 엄마 Aug 31. 2023

"엄마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와."

선택하라면 단연 가정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정까지 타협해 가며 회사에 헌신했는데 윗사람들 사이에서는 헌신짝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슬플 때보다 억울할 때 눈물이 났는데, 그래서 억울해도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남편에게 카톡을 했다. "이따 통화될 때 카톡 줘."

남편은 업무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미팅을 많이 하느라 업무 중에도 카톡과 통화가 어려울 때가 있었는데, 웬일인지 바로 답이 왔다. "무슨 일 있어? 지금 통화 돼."

그 와중에도 이 부서 저 부서에서 나를 찾고 할 일은 쌓여가고 있었지만,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테라스로 나갔다.


"남편...."


"아내, 무슨 일이야!"

(우리 부부는 서로를 '남편'과 '아내'라고 부른다. 결혼 전 함께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들을 때 "아내분" "남편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그게 너무 듣기 좋아서 지금까지도 서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수화기 너머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음을 터뜨렸다.


"나 정말 이런 취급받으면서 못 다니겠어..."


"자기야.. 힘들면 때려치워버려.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가족 하나 건사 못하겠어? 자기 좀 쉬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물론 같이 벌면 좋지만, 이렇게 몸, 마음 상해 가면서까지는 아닌 것 같아. 내가 장난으로 자기 돈 많이 버니까 평생 다니라고 했었는데, 사실 그건 내 진심은 아니었어."


얼마 전 연봉인상에다 직책까지 맡게 되면서 월급이 많이 올랐고, 그래서 늘 장난처럼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말하던 남편이었다. 나의 잦은 야근과 주말근무로 나는 회사 일로, 남편은 육아로 힘들어 다투는 일이 늘었고, 밤 12시는 돼서야 잠드는 아이 때문에 마지막으로 진지한 대화를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남편과 나누는 둘만의 대화에 한참을 테라스에 서서 통화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책상에 어지럽게 쌓인 보고서 더미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를 찾는 메신저의 반짝이는 대화창들, 전화기에 찍혀있는 부재중 전화를 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한창 예쁠 시기인,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이준이와의 시간도 타협하고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아깝고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처음 복직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이준이를 1순위에 두겠다고 했던 다짐과는 달리 이준이가 아플 때도 남편에게 맡기고 출근하며 지금 당장 급한 회사 일을 걱정했던 내가 미련스러웠다.


"엄마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와."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회사 선배이자 워킹맘 선배가 얼마 전 내게 말했다. 회사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 애쓰면 집에서는 부족한 엄마가 되고, 칼퇴에 잦은 연차로 아이와 가정에 신경을 더 쓰면 회사에서는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는 직원이 된다. 나는 그 중간지점을 찾으려 하루하루 애써 저글링을 하고 있었고, 이제는 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았다.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가족과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죽기 전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한다. 나는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 가고,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먹을 수 있을 정도는 가지고 있고, 사랑하는 남편과 토끼 같은 아들이 있다.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은 회사가 아니라 가정이다.

 

회사 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말의 책임감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에 대한 죄책감도 오늘 부로 내려놓기로 했다. 야근과 주말근무도 자제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꾸역꾸역 해내려고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 밉보이더라도 나는 가정과 나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선택하라면 단연 가정이다.




다음 날, 윗병이 도진 것 같아 병원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아이 등원을 남편과 함께 시켰다. 나보다 출근 시간이 1시간 늦은 남편이 이준이 등원을 도맡아 하고 있다. (내가 야근하게 되면서 하원도 남편이 시키고 있다.)


오랜만에 엄마가 아침에 집에 있는 것을 보고는 눈뜨자마자 엄마를 꼬옥 껴안고 놓질 않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어설픈 발음으로 "해님이 방긋 웃고 있네, " 말하는 이준이를 내려주고는 "엄마 빠빠-. 이따 저녁에 올게." 하니 닫히는 어린이집 문 사이로 신나게 손을 흔들어준다.


내려놓기로 생각하니, 출근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볍다. 오늘은 칼퇴를 해야겠다.

이전 04화 언제쯤 서울로 돌아가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