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정기호
- 나이 : 49 세
- 직업 : 기업대표 겸 사장
- 특징 : 노력하면 된다 라고 믿음.
- 7 년 전, 강남 조그마한 사무실, 오후
" 저.. 김대리, 미안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 네. 말씀하세요. "
무역회사를 나와 홀로 회사를 차리고 어느덧 직원 4명을 거느린 작은 오퍼상 대표가 된 정기호는 지금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직원을 불러 부탁을 하고 있었다.
바이어와의 중요한 미팅을 위해 서류와 샘플을 챙기던 그에게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 지금 민서가 열이 너무 나고, 아픈데.. 어쩌지? "
" 어쩌긴 뭘.. 빨리 병원에 가야지. "
" 119 부르기도 애매하고, 지금 민서 데리고 택시 타기도.."
기호의 아내는 운전면허가 없다. 운전이 무섭다고 했다.
" 당신이 지금 집에 오면 안 될까? "
" 아... 나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잠시만 내가 김대리한테 부탁해 볼게. "
기호가 가장 신뢰하는 김대리는 언제나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계약이 틀어질 뻔한 일에도 악착같이 바이어를 설득하고 설명하는 모습을 옆에서 볼 때면 젊을 때 기호의 본인 모습을 보듯이 흐뭇했다.
때로는 업무 외적인 기호의 부탁에도 선뜻 나서서 해결해 주니 참으로 고마운 직원이었다.
'김대리가 내 친동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민서의 입학식과 졸업식, 학교 수업 참관 등에도 김대리는 함께 해주었고, 기호의 아내가 마트에서 쇼핑할 때에도 가끔은 김대리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기호의 업무상 접대가 있을 때면 2차, 3차 술자리와 함께 기호의 취향에 맞는 파트너를 선정하여 호텔까지 안내하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차츰 회사의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전반적인 업무는 김대리가 아닌 김전무가 된 그의 몫이었다. 여전히 기호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김전무였기에 가능했다.
- 현재, 강남의 빌딩 옥상, 야간
' 아.. 씨발, 왜 몰랐을까.... 방법이 없네.'
몇 달 전부터 이상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들어와야 할 거래처 대금이 미납되었다는 것이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뭔가 착오가 있는 듯 하니 확인하겠다는 대답을 하고서도 그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은행에서는 어찌 알았는지 통장 압류 및 경매 통지가 날아오고 법원의 각종 소송 서류들이 밀어닥쳤다.
그 사이에 기호의 아내가 보낸 이혼 조정 서류도 있었다. 이혼신청 사유는 '남편의 외도와 재산 분할'. 동봉된 서류에는 오랜 기간 기호가 행한 외도 사실과 상간녀의 내용 등이 세밀하게 적혀있었다.
경리부장을 불러 현재 회사의 재무 상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텅 비어 있었다. 통장도 회시도 기호 머릿속의 희망이라는 것도.
김전무는 오랜 기간 동안 치밀하면서도 합법적으로 비자금을 기호의 명의에서 김전무의 명의로 이전해 놓았고, 채무와 대출, 지불해야 할 거래처 대금만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또한 기호의 외도 하던 모습과 불륜의 관계를 조목 조목 정리하여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딸 민서의 해외 유학을 핑계로 아내는 미국에 생활한 지 어언 3년, 그 뒤를 따라 김전무도 떠났다. 아빠인 나 보다 김전무를 더 따르던 딸이기에 그 세명은 이제 행복한 가정을 완성한 것이다.
' 가능만 하다면 예전의 나를 죽이고 싶었다. '
건물 옥상의 바람은 그를 재촉하듯이 보였다.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정말 끝날 수 있을까? 기억도 함께 지워지겠지? 내 숨이 빠져나갈 때 내 원한과 후회, 짧았지만 내가 꿈꾸던 가짜 쾌락과 목표. '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 2초 혹은 그 이상의 순간이 정말 길겠지?
고통스럽겠지? 아니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지금 보다는 좋을 거야. '
잠시 후 그의 몸이 건물에서 멀어지고 그의 머리와 팔이 허공에서 바람과 잠시 만나 공기란 것을 느낄 때에 바닥엔 커다란 공간이 열리고 다시금 회오리처럼 빙빙 도는 깊은 수렁이 그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입에서는 비명이나 숨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고, 기호는 눈을 감고 빨리 이 순간이 지나길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