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미인'을 생각하며
선배님
계절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시월의 마지막 날 오후... 오늘도 선배님의 글을 읽어봅니다.
늘 그러하듯이 정성이 하나 가득 담긴 선배님의 글. 대할 때마다 반갑고 기쁘고 숙연해지네요.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2024. 10. 30.
저는 강의를 하면서 가끔 학생들에게 '생각거리' 숙제를 내줍니다. 생각하며 하루하루 삶을 열어가시는 선배님과 달리, 젊은 친구들은 별로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사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며 숙제를 내주죠.
특별한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 말고 생각나면 생각하세요.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집 청소하다가 설거지하다가, 불현듯 생각나면 멍 때리며 생각해 보세요. 새로운 생각, 기발한 생각을 말해주면 달콤한 초콜릿을 드리죠. 성적과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숙제는 해 와도 그만, 안 해와도 그뿐. '자원 용사'만 대답하면 되는 거죠. 그래도 그 자리에서 1초 만에 숙제를 해치우고 열심히 손 들고 답변하는 학생들이 꽤 많답니다. 하하. 대학생들에게도 초콜릿의 유혹은 상당히 강력한 모양이에요.
'미인 美人'이라는 단어는 그 '생각거리'로 던져주는 화두 중의 하나랍니다.
제가 '미인'을 좋아하거든요. ^^;;
선배님은 그런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신가요?
'미인'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아름다운 사람'이란 뜻이겠죠. 그런데...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대체 뭘까요?
그러고 보니 '미인박명 美人薄命'이라는 말도 있군요. 사전에는 "미인은 불행하거나 병약하여 요절하는 일이 많음" 요렇게 적혀 있네요. 좀 상투적이죠? 혹시 세상의 속인俗人들이 '미인'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저주'하는 말은 아닌지,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학생들도 그 엉뚱함의 행렬에 가담하라고 이렇게 유혹합니다.
뻔한 얘기 말고, 뭐 좀 참신한 해석이 없을까요? '미인'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미인박명'이란 말은 또 무엇일까... 참신하고 기발한 생각을 들려주면 초콜릿의 달콤함이 여러분 입안 가득 스며들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열심히 생각해 오세요. 아셨죠?
선배님도 참여해 보지 않으시겠어요? 언젠가 선배님이 주셨던 것보다 더 맛난 초콜릿을 드릴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도 모두 함께 참여해서 고견을 들려주지 않으시겠어요? 학생들처럼 일주일 동안의 생각 시간을 드리기는 그렇고... 노래 한 곡조 들으시면서 잠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가수 신중현의 <미인>이라는 노래입니다. 들으시면서 '미인'이란 무엇인지, '미인박명'이란 말은 또 무엇인지, 생각하지 말고 생각해 보시어요? <미인> ☜ 클릭!
와우... 1974년에 발표한 아주 오래된 노래군요.
인류가 '미인'을 노래하며 예찬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코가 기다란 피노키오 서양 동네 사정은 제가 잘 모르니까 동아시아의 기록만 놓고 본다면 2,000 년도 훨씬 더 되는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한나라 무제 때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의 관리였던 이연년李延年이 부른 노래네요. 절세미인, 경국지색 등등...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미인'을 지칭하는 4자 성어들을 탄생시킨 노래였죠.
그 시절 그 멜로디는 아니지만 이연년의 그 가사로 직접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영화 《십면매복 十面埋伏》의 삽입곡 버전! 중국 가수 수만蘇曼(1979~)이 노래하고, 유명한 배우 장쯔이章子怡가 춤을 추는 고혹적인 장면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멜로디죠. 들어보셔요?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이연년李延年,<미인의 노래 (佳人歌)>
영화 《십면매복 十面埋伏》삽입곡, <미인의 노래 (佳人歌)> ☜ 클릭!
가사: 이연년李延年, 노래: 수만蘇曼, 춤: 장쯔이章子怡.
어떠신가요?
이연년이 지었다는 이 <미인의 노래, The Beauty Song>, 마음에 드시나요? 다섯 번째 구절에서 '寧不知' 세 글자만 없으면 완벽한 5언 고시입니다. 그래서 후세에 5언시를 태동시킨 노래라는 평을 듣기도 하죠.
아무튼 멜로디도 좋고, 가수도 좋고 춤도 좋은데요, 저는 가사가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미인'의 기준이 오로지 '외모'에 국한된 것 같아서요.
선배님도 잘 아시다시피 한漢나라는 당唐나라와 함께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아주 강력한 왕조였죠. 그래서 오늘날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하고, 중국어를 한어漢語라고 하잖아요? 또 고대의 중국 글을 한문漢文이라 하고, 고대의 중국 시를 한시漢詩라고 합니다. 중국 전통문화의 기틀은 바로 이 시대에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점은, 아마도 그가 '악부樂府'라는 관청을 만들어 시와 음악을 관장하게 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우린 지금 중국 시와 중국문화를 이야기하는 중이니까요.
'악부'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부'에 해당하는 관청인데요, 원래 선진 시대의 주周나라처럼 민심을 살피기 위해 민간의 가요를 수집하는 게 가장 큰 업무였거든요?
그 업무를 맡아보라고 '협률도위協律都尉' 벼슬을 제수받았던 이연년은, 그런데 '알랑방귀쟁이'였나 봐요. 자신의 장기長技였던 음악과 춤으로 궁중 연회 석상에서 황제에게 '방중房中의 열락悅樂'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네요. 아마도 황제의 sexual fantage를 위한 도구로 음악을 써먹었던 모양이죠?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 상上》을 보면 이런 기록도 전해지는군요. 어느 날 연회 석상, 황제의 귀에 새로운 노래가 들려왔대요. 이연년이 춤을 추며 바로 위에서 소개한 <미인의 노래 (佳人歌)>를 부른 거죠. 이번에는 불초 소생 소오생의 낭송으로 들어보시와요?
며칠 동안 이어진 잔치에서 이연년이 계속 이 노래를 부르자, 가스라이팅이 된 한무제가 마침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네요.
네, 폐하~ 협률도위 이연년의 여동생의 미모가 그러하다고 들었나이다~
옆에 있던 한무제의 누이 평양공주가 나긋나긋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네요. 한무제가 냉큼 그 여인을 불러보니 정말로 기가 막힌 용모에 춤까지 뛰어났다네요. 그래서 이연년의 누이는 무제의 총희 이부인이 되었다네요. 그래서 이연년도 한무제의 사랑을 더욱 많이 얻었다네요.
이연년(오타 조심하세여... 전 타이핑을 할 때 자꾸만 가운데 글자를 빼먹네여...^^;;)에게 '미인'은 '노래'나 '춤'과 함께 오직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이었던 모양이죠?
선배님. 근데요, 의심쟁이 소오생은 뭔가 이상해요. 이연년에게 그렇게 절세미인 여동생이 있었다는 거... 정말일까요? 너무 공교롭지 않나요? 또 평양공주는 하필 그 장면에서 왜 나섰대요? 뭔가 짜고 치는 고스톱의 냄새가... 이 여자들... 이연년과의 관계가 은근 수상합니다. 히야, 요것들 봐라? ^^;;;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죠. '미인'이 무슨 뜻인지 그 얘길 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름다울 미美'
'사람 인人'
'미인'이라는 단어 그 어디에도 '여성'에 국한한다, '외모의 아름다움' 만을 지칭한다, 그런 뜻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흔히 우리가 '미인'을 '외모가 예쁜 여성'이라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뭘까요? 이연년의 노래 탓일까요? '아름답다'는 외모에만 사용할 수 있고, 내면세계를 지칭할 수는 없는 말일까요? 특히 궁금한 것, '미인'은 꼭 여성이어야만 하나요? 남성한테 쓰면 안 되는 말일까요?
그러고 보니 이연년보다도 약 300년 더 오래된 옛날에도 '미인'을 예찬한 시인이 있었네요. 전국 시대 초나라의 삼려대부 굴원屈原(B.C.340~B.C.278)이 바로 그 사람. 예전에 제가 몇 번 얘기했었죠?
<01. 초혼>
그가 <구가 九歌>라는 연작에서 노래한 <사미인 思美人>의 '미인'은 누구인지, 한번 들어보셔요?
思美人兮, 擥涕而竚眙。媒絶而路阻兮, 言不可結而詒。
蹇蹇之煩冤兮,陷滯而不發。申旦以舒中情兮, 志沈箢而莫達。
願寄言于浮雲兮, 遇豊隆而不將; 因歸鳥而致辭兮, 羌迅高而難當。
'미인'이 누구인지 아시겠죠?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덕분에 우리 모두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귀양을 간 정철이 그 옛날 굴원을 흉내 내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써서, 후세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에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잖아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미인'은 '외모가 예쁜 여자'가 아니라 '임금'이죠.
저는 그런데 굴원이나 정철이 예찬한 이 '미인'의 개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을 귀양 보낸 임금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이른바 '고신연주孤臣戀主' 형식의 노래가 좀 치사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임금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저 억울하니까 다시 불러주세여, 네? 허연 수염이 잔뜩 난 노친네가 여성인 척, 사랑을 구걸하는 게 영 꼴불견이잖아요. ^^;;
굴원의 '미인'은 구체적으로 초회왕 또는 초나라 경양왕을 가리킵니다. 둘 중 누가 되었든 혼군昏君이긴 마찬가지. 정철의 '미인' 역시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던 지지리도 못나디 못난 임금 선조잖아요. 그런 혼군들한테 '미인'이라뇨! 정말 가당치도 않은 얘기죠. 짜증 납니다.
딱 하나!
우리가 굴원이나 송강 정철의 <미인의 노래>에서 배울 점은 딱 하나, 남성에게도 '미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 아닐까요?
중국문학사상 최고의 천재 문인, 북송 시대 동파東坡 소식蘇軾도 '미인'을 예찬한 적이 있답니다. 어떤 노래인지 한번 살펴보시죠.
雙頰凝酥髮抹漆, 眼光入簾珠的皪。
故將白練作仙衣, 不許紅膏污天質。
吳音嬌軟帶兒癡, 無限閒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 閉門春盡楊花落。
소동파, <박명가인 薄命佳人>
아하, '미인박명'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군요? 동파가 항주 인근의 어느 절에서 우연히 여든이 넘은 노 비구니를 만났는데요, 그 나이에도 그 자태가 어찌나 곱던지 탄식하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미인박명'이라고 하면 흔히 "어여쁜 여자는 팔자가 기구하거나 일찍 죽는다"라는 뜻으로 생각하지만 원작에 의하면 적어도 '요절한다'는 편견 하나는 깰 수 있겠네요. 동파가 묘사한 그 '미인'은 여든이 넘은 나이었다니까요.
사실 고대의 '미인'이나 '가인 佳人'은 '여성'만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어요. 왕족이나 귀족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재주가 있는 사람, 덕망이 높은 사람 등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세상살이하기가 쉽지 않죠.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늘 시기와 질투와 모함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삶은 평탄하지 못하고 늘 기구한 것 아닐까요?
소오생은 박명薄命할지언정 가인佳人/ 미인이 되고 싶습니다.
선배님
저는 '미인'에 한 가지 개념을 더 추구하고 싶습니다. 비록 모순과 비극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맑고 곱게 살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미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이, 숙제와 같이 착한 이들... 그들은 맑고 어진 행동을 쌓으며 살았는데도 끝내 굶어 죽고야 말았죠. 칠십 명의 제자 중에서도 공자가 유일하게 학문을 사랑하는 제자로 꼽았던 안연顔淵. 그는 늘 가난에 허덕여 조악한 음식을 먹고 지내면서도 만족할 줄 알았건만, 끝내 요절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런 삶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말했죠. 부귀영화 따위를 얻기 위해 맑고 고운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요. 백이 숙제 안연은 이름이나마 남겼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또 얼마나 많은 맑고 고운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사라져 갔을까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인'이 아닐까요?
제 주변에도 여러 이름 없는 '미인'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중 두 사람의 '미인'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소오생의 벗님인 김우한 화백입니다. 그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예전 군사정권 당시, 그가 국전에 출품한 작품에 진도 씻김굿 장면이 있었답니다. 마침 그 해의 심사위원이 은사님이었다네요. 그분이 씻김굿 장면을 빼면 대상을 주겠노라 제안을 하셨대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결국 해직되어 지금 초야에 묻혀 지낸답니다.
후회한 적 없느냐고 물어보니, 먹고살면 됐지 뭐가 아쉬워서 작품에 모욕을 가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군요. 선배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돈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맑고 곱게 사는 해직교사의 길을 선택했으니, 그 정도면 '미인'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요?
(상) 김우한, 연작 <미정지>. 대상 제안을 받았던 작품과 유사한 연작 중의 하나.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김대례 무녀의 씻김굿 장면이 보인다. (하) 김우한, <소리옥수수바람>. 맑고 곱게 살고자 하는 '미인'들이 겪게 마련인 폭풍우 속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또 한 사람은...
선배님,
바로 당신이십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 아픔과 슬픔, 그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버텨오신 선배님. 그런데도 당신의 글은 언제나 그윽한 숲 속의 비 개인 아침 햇살, 환난의 삶을 맑고 곱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무지개처럼 영롱합니다.
당신의 글은 삶의 무더위에 지친 여행길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힐링의 장소, 이 세상의 모든 따스하고 부드럽고 정겨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선배님,
당신은 누구신가요?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저의 소중한 브런치 글벗 작가님들이십니다.
스스로 고난과 아픔의 삶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싱그러운 글로 다정하게 타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응원해 주시는 여러 글벗 작가님, 당신이야말로 저의 진정한 '미인'이심을 고백합니다.
선배님,
저도 당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명薄命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인'이 되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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