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방송과 함께 굉음이 들리자 사람들은 출입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리면서 넥타이를 꽉 조이거나, 들고 있던 핸드백을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곧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좀비들이 맛난 먹잇감을 찾은 것 같이 출입문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고, 처음 보는 희귀한 광경에 잠시 정신을 잃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다행히 다음 열차는 출입문을 눈앞에 마주하며 겨우 끼여서 탈 수 있었다. 출근길에 소음 없이 노래를 듣고 싶어 충동구매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끼고 노이즈 캔슬링 모드로 전환했다. 그리곤 아버지가 약주만 드시면 얼굴이 시뻘게지며 고래고래 불러 대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었다.
그러다 열차가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고 습관적으로 지난 4개월 간의 일들에 잠겼다. 반년 전, 나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는커녕 군대에서 처음 만나 절친이 된 동진이의 꼬드김에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 해변가
제주도를 가기 전날 밤까지도 나는 누워서 제주살이 단점 영상만 찾아봤다. 부푼 꿈을 안고 제주살이를 떠난 사람들은 2주 만에 돌아왔다며 구독자들의 제주행을 말렸다. 막상 나의 제주살이는 기대가 없어서 인지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동진이 덕에 나에게 안성맞춤인 일을 금방 찾았다. 마침 그가 일하는 바닷가 옆 게스트하우스에 매니저 자리 하나가 있었다. 아침 7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출근해 손님들을 위해 에그 마요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준비해주고, 손님들이 떠나면 소주, 맥주병이 나 뒹구는 파티 장소와 개다 만 이불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스트룸을 치우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았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재즈 한 곡을 틀어 놓고 가지는 티타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게스트하우스 옆에는 아메리카노가 유명한 카페도 있었다. 사실 나는 커피 맛을 잘 모른다. 쓰기만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시원한 보이차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이런저런 업무가 끝나면 저녁 7시에 시작되는 디너파티를 진행했다.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어색해했지만 소주 한 잔, 두 잔 함께 기울이다 보면 금세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처럼 굴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즈음 나는 파티 장소에 있는 낮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오늘 저희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해주신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 노래 한 곡 올려드리겠습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그러곤 오래된 클래식 기타를 치며 아버지의 18번 곡인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어떤 손님들은 동영상을 찍었고, 다른 손님들은플래시가 켜진 스마트폰을 머리 위로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여느 콘서트장이 부럽지 않았다. 이 분위기에서는 무슨 곡을 부르든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다. 곡이 끝나고 나서는 다들 내 인별그램 계정을 물어 팔로우하거나 자신의 스토리에 절친한 친구처럼 태그 했다. 물론 다음날 퇴실 시간이 되면 다들 어색한 얼굴들이 되었지만, 그마저 재미있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났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때때로 불안에 휩싸이긴 했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다 어느 늦은 밤 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안부 전화를 하고 그 이후 처음 온 전화였다. 진동 소리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암시하는 듯 소란스럽게 울려댔다.
[사진 & 이미지 출처] MinUK, HA @ha_r_u_247 / 김유인, @studio_yoosoo /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