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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Oct 13. 2023

우리는 경주하듯이

시시콜콜한 경주기행 10



경주 교촌마을에 가면 최부자댁을 중심으로 주변이 관광단지화 된 것을 볼 수 있다. 인근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다양한 식당과 체험거리 그리고 트렌디한 간식거리가 넘치니 온 마을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요즘은 어딜 가도 어렵지 않게 한옥마을을 볼 수 있는데, 만들면 이처럼 관광객들이 찾아오니 각 지역에서는 한옥마을 만들기에 열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 교촌엔 다른 곳들과는 다른 특별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 마을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최부자댁의 오래된 이야기이다.     




18세기말부터 이앙법의 빠른 도입으로 부를 축적한 경주 최 씨 가문은 이를 활용하는 방법이 다른 양반들과는 달랐다. 무엇이 달랐는지는 가훈인 육훈六訓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조금만 음미해 봐도 최 씨 가문은 부자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 알고 행했던 흔치 않은 리더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과욕을 부리지 않았으며, 가문이 당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양반자격만 보유하도록 가르쳤고, 집안의 식구에게 검소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항상 주위를 살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했으니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과 부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12대에 걸친 최 씨 가문의 일화엔 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변을 업신여기고 자신밖에 모르던 천박한 수전노가 아닌 더불어 살 줄 아는 참된 부자였다.  


아쉽게도 자자손손 이어진 만석꾼의 집안이 과거의 화재로 인해 남아있는 건물이 몇 채 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검소한 느낌을 주는 고택을 거닐다 보면 집 한편에 덩그러니 서있는 곳간채를 볼 수 있다. 이곳은 흉년이나 춘궁기 때 굶주린 사람들이 부담 없이 곡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든 곳인데, 그 크기를 보면 마을 사람들이 최부자댁을 향해 느꼈을 존경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을 살펴보니 이 곳간채는 칠백에서 팔백석 정도의 쌀을 쌓아 놀 수 있었다고 한다. 쌀 한 석이 160kg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생존과 직결된 곡식의 나눔은 마을 공동체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었을 것이다. 부자의 품격이란 이런 데 쓰는 말이다.


이들의 책임감은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어졌다. 최 씨 가문의 12대손 최준 선생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지원한 금액이 임시정부 필요 자금의 6할을 넘었다는 기록이 고택의 광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해방 후엔 지금의 영남대를 설립하는데 전재산을 쾌척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위기에도 기회주의자가 넘치던 그 시절, 최부자 가문이 보여준 지도층의 책무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택 밖 한옥마을을 한가로이 거닐다 보니 교동법주라는 전통주 판매소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이곳에도 있었다.


집에서 담근 술을 가양주라고 부른다. 제사와 손님 접대에 필수 요소였던 가양주는 양반가에선 소홀할 수 없었기에 과거엔 유명 가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제조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위대한 무형유산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술을 제조하는 데는 많은 쌀이 필요했기에 수탈에 진심이었던 일제가 법령으로 가양주 제조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 암울했던 시기를 생각해 보니 이념갈등을 부추겨 친일을 정당화하는 정치인들의 욕망에 스멀스멀 혐오감이 올라온다.


머릿속 불쾌한 장면도 전환할 겸 전통주가 얼마나 되는지 검색을 해봤다. 생각보다 다양한 전통주가 판매되는 것을 보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생겨 장 씨 집안 가양주가 남아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작은 실마리조차 인터넷상에선 찾을 수 없었다. 나를 통해 가문의 특성을 짐작해 보건대 술 담글 시간에 진로 걱정으로 애꿎은 진로 소주만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경주 최 씨 가문은 달랐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다 이겨내고 꿋꿋하게 전통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 또한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일이다.  


최부자댁 가양주의 정식 명칭은 교동법주로 보통 엄격하게 체계를 지켜 빚은 술을 법주라고 한다. 궁금한 마음에 열려있는 대문을 통해 들어가 보니 최 씨 집안의 후손분이 혼자 사무실을 운영하며 가양주 판매도 하고 있었다. 마침 저녁자리의 주인공이 필요했던 우리는 기꺼이 법주 한 병을 구입했다. 흐뭇하게 법주병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와중 와이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술 마시러 가는 건데 뭐 하러 멀리까지 가? 차라리 친구들하고 여기서 방 잡고 마시지."


.. 아내의 이과적 사고방식은 핵심을 찌를지언정 인간미는 늘 부족하다.   



쉴 틈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겉만 멀쩡하지 내구력이 형편없는 우린 남은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이른 저녁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체력이 떨어졌을 땐 고기만 한 게 없다. 검색으로 발견한 석쇠불고기집 한 곳이 한옥 외관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음식 평도 좋아 찾아가 보았다.


맛은 모양새에 비해 평범해서 오히려 놀라웠다. 알고 보니 점원과 사장님 모두 중국분이었는데 한옥집에서 기대와는 다른 대륙의 솜씨를 보았으니 뭔가 속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여행 중 유일하게 아쉬웠던 음식점이었으니 그동안 너무 잘 먹고 잘 쉬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물은 반잔밖에 안 남은 것이 아닌 반잔씩이나 남은 것이다.     


인근 재래시장에 들러 회와 튀김 등 안주거리를 구입하곤 숙소가 있는 양동마을로 향했다. 실은 전날의 악몽이 남아있던 우리였기에 숙소 관리어르신께 방을 바꿔달라 간청했다. 얘길 들으신 관리어르신이 불편하면 할머니가 계신 별채에 에어컨이 딸린 작은 방이 있으니 그 방을 사용하라는 말에 우린 지체 없이 짐을 옮겼지만 결과적으론 의미 없는 일이었다.

 

방을 옮긴 후 인사도 드릴 겸 주인할머니를 뵈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사도 문밖에서 받으실 정도로 몸이 불편하셨는지 통 얼굴을 보여주질 않으셨는데 우린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분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할머님께서는 전기사용에 매우 예민하셨는데, 에어컨을 켤 때마다 어떻게 아셨는지 방 밖으로 나오시곤 알아듣기 어려운 억센 사투리로 타박을 주셨다. 그리곤 에어컨을 꺼버리곤 다시 들어가시니 눈치가 그리 보일 수 없었다.  


남자 셋은 강제로 조신하게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우린 숙소운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여행의 신이 고생으로 우리의 죄를 정화시키려는 것이라는 생각에 짜증도 나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으니 편한 것이다.


쌀가마의 무게 같은 피곤에 교동 법주의 힘까지 더해지니 전날과는 달리 쉽게 잠들 수 있었다. 풀벌레도 잠들어 조용한 밤, 휘영청 둥근달 아래 별채 할머니의 마른기침 소리만 커튼 같은 그 밤의 끝자락을 흔들어댔다.      




(11부로 이어집니다)






다시 칠해질 여행기. 2023. 10. 13. J. K.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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