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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Oct 15. 2023

우리는 경주하듯이

시시콜콜한 경주기행 마지막 이야기



시골 한옥집의 아침은 빠르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방 깊숙이 들어와선 여행자의 게으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샤워 후 짐 정리에 청소까지 마치니 그제야 노란 장판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이 한지 장판이 이리 빛났던가. 막상 떠나려니 느껴지는 묘한 아쉬움에 움직임의 속도를 줄여 집의 곳곳을 쳐다보았다. 마당의 나무, 풍광 그리고 허름한 방마저도 오후가 되면 마주할 내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떠나려는 자의 감정만 시선에 잔뜩 묻어났다.       


깊게 주무시는지, 어딜 나가신 건지 여전히 인기척이 없는 할머님께 응답 없는 인사를 드리곤 집을 나섰다. 차 밖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자 하얀 뭉게구름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우릴 배웅했다. 낮의 양동마을은 밤보다 이리 아름다운데 우린 멀리서 애먼 고생만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훗날 기회가 생긴다면 낮의 이야기로 다시 이곳을 기록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사진 몇 장에 담았다. 덜컹거리는 길을 지나고 아담하고 예쁜 교정의 양동 초등학교를 지나서야 우린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늦은 아침으로는 사진작가 친구가 검색만으로도 홀딱 반한 맛집을 찾아갔다. 그곳은 회를 산더미처럼 쌓아주는 것으로 유명한 회식당인데 선택지가 회덮밥 하나밖에 없어 기대가 됐다. '그거 하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는 무언의 자신감은 단출한 메뉴판에서도 느껴졌다.


평소에는 줄을 길게 서서 대기 시간이 긴 맛집이라는데 우린 애매한 시간에 방문하여 대기가 길지 않았다. 낙서로 가득한 벽지를 뒤로하고 테이블에 앉아 인원만 말하면 되니 주문이 쉬웠다. 주위를 두리번대는 사이 홍합탕을 필두로 식사는 공격적으로 턱턱 상에 깔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마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 같았다. 둥. 둥. 둥. 둥.


이 집은 독특한 초장맛으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재료를 넣고 숙성시킨 비법 초장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평이 있었는데 가게의 입구에서 초장만 사가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보니 맛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가벼운 흥분을 감추며 초장을 듬뿍 넣고 밥을 비벼 크게 한 숟가락 입에 넣었는데..




절로 나오는 외국인 제스처와 박수. 브라보.


여태 먹었던 회덮밥들은 가쓰오부시 덮밥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성한 회와 다양한 맛이 녹아든 초장의 조합은 세간의 평 이상이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블로그에선 왜 그리 어설프게들 묘사했는지 화가 난 우리는 밥을 우걱대며 각자의 세밀한 평을 나눴다.



"내가 이 집 맛있을 거라고 했지?"


"이 집 맛집이네."


"이 집 초장이 맛있네."  



서로의 세련된 평가에 만족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며 대기하는 사람들의 줄은 점점 길어졌다. 흡입하듯 음식을 해치운 예비 푸드 칼럼니스트 셋은 식당의 회전율을 높이자 대의를 위해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어림잡아보니 열차 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어 경주국립박물관을 찾았다. 구획이 잘 정리된 전시관을 걸어 다니며 익숙한 유물들과 낯선 유물들의 조합을 보았. 유독 금관이나 금 장식물엔 인파가 몰려있었는데 화려한 금빛과 세밀한 금세공 기술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던 것은 역시나 성덕대왕 신종이었다.


박물관 옆을 지키는 커다란 종 앞에는 예상보단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어 오래된 종은 그들의 뒤에서 얌전히 매달려 있기만 했다. 아쉬운 사실이지만 보존 문제로 실제  소리를 들을 순 없다. 하지만 한 시간에 십 분씩 녹음된 종소리를 재생하여 그 소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시간만 잘 맞춘다면 신종의 소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운이 좋게도 우린 종소리를 틀어놓은 타이밍에 방문하였다.


에밀레종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감상 포인트가 매우 많다. 우리나라의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비천상(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선인)이나 용머리가 하나인 용뉴(고리) 등의 외형부터 시작하여 여운이 남다른(맥노리) 종소리까지 다양한 매력이 종 하나에 담겨있다. 또한 이 커다란 종을 만들고 작은 구멍의 용뉴에 매달수 있었던 기술력 역시 극찬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다른 것들 보다는 에밀레종의 구전설화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분이 넘도록 끊어질 듯 다시 살아나는 맥노리에 가슴으로 소릴 듣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 에밀레~ 에밀레~ '        



에밀레종 전설은 민가에서 구전된 설화로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록은 매일신보에 실린 창작동화 <어밀네 종, 1925년>이다. 이 기이한 설화를 간단히 축약해 보면 신라의 경덕왕이 아버지를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니 곳곳에서 모금활동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중 모금활동을 하던 스님 한 분에게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가 기부를 거부하며 줄 것이 아이밖에 없으니 이 아이라도 데려가라고 농을 건넸다. 후에 모금이 끝난 후 종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제대로 나질 않아 점을 쳐보니 부정의 요소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스님에게 건넨 아낙네의 가벼운 농 때문에 부정을 탔다는 것이다. 아, 스님.. 결국 종이 제 소리를 내기 위해선 아이가 강제로 종 만드는 일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인신공양 후 종은 소릴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구슬프게도 에밀레(에미탓에) 소리와도 같아 에밀레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두가 익히 아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종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이를 바쳤다는 일이 왜 자연스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버지를 위한다며 그 일에 어린아이를 바치다니. 나는 이야기의 힘이 종종 두려울 때가 있는데 이런 사례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 부정적인 요소를 잘 만들어진 이야기에 몰래 심어두면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이야기 전체를 믿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연예인 찌라시와 카더라 통신의 원형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기록이 시작된 시기가 일제강점기라 그런지 자꾸 불편한 이웃을 의심하게 된다. 신라와 국보를 동시에 폄훼하기 딱 좋은 프레임이라는 것은 나의 편향된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답을 알 수 없는 나는 그저 시대정신을 잘 읽고 있긴 한 건지 자문할 뿐이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박물관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미처 가보지 못한 중요 유적지가 남아 있었으나 그곳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남겨 두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셋이 다시 경주를 방문하게 된다면 새로운 기행문을 쓸 수 있길 바랐다. 떠날 때 이 마음을 두고 가니 다시 찾을 때는 그 빛바램마저도 애틋할 것이라 믿었다.


몸뚱이에 비해 좁은 KTX의 의자에 앉아 여행 중 찍었던 사진을 보고 나니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표정이 음식 앞에서 가장 밝았다는 것이다. 

머리를 기대 눈을 감고 반추해 보니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즐겁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우리 영혼의 젊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3일 만에 들어가는 집인데도 괜히 쑥스럽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웃는다.    


- FIN -      

     














When we were young. 2023.10. J. K.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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