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가을이에요.

마음을 담고 싶은데 담아낼 마음이 없을 때

by You앤Me Art Place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고민 없이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나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것은 계란 프라이를 해 먹는 것처럼 쉬웠고 언제든 그리면 됐었다.
소재를 고민한 적도 없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냥 그렸으니까.
특별히 의미를 찾지도 않고 재미 삼아 무심하게 또는 열정적으로 또 어떤 날은 괴롭고 슬퍼서 퍼붓듯이 미친 듯 그려대기도 했다.

검정 모나미 볼펜이 모이고 모여 한 줌 정도 되었을 땐 비싼 거 쓰지 말고 있는 거 다 써 보자 해서 볼펜 그림만 줄구 장창 그리기도 했다. 그때 그린 눈 오는 날의 숲 속 가로등 그림은 지금도 좋아서 가끔 들여다보곤 한다.
아트 클래스를 열고 쓰다 남긴 물감이 아까워 굳기 전에 어디든 발라놓고 그 색을 빌미 삼아 그리면 참 신선했다.
버려진 캔버스에 원래 있던 그림을 지우지 않고 그 밑색까지 겹쳐 그리면 뜻밖에 멋지기도 해서 혼자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 잘 보일 일도, 그림을 팔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고 또한 나 자신에게 잘 그리기를 스스로 강요한 적도 없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림 그리는 그 과정은 나에겐 오롯이 선물이었다.

어릴 때 나는 한동안 실어증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림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말없이 담아내는 도구가 되었다.
친구집에 놀러 가 매일 열 장씩 크레파스 그림을 그려대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밥 먹을 시간이 되고 밤이 되었다.
그림들은 언제나 소중했고 싫어하는 색 없이 각각의 색들은 다 근사해서 모든 컬러를 사용해서 그리는 것이 좋았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날이 왔다.

그런 날도 온다.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아무리 그려보려 했지만 그려지지 않았다.
의욕 없고 막연하고 막막하기까지 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서먹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때가 나에게도 생겼다.
붓을 들어봐도 흥미로운 미술 도구를 들여다 보아도 감흥 없이 시작의 엄두조차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냥 당연히 그리는 줄 알았는데, 이유도 모른 채 그릴 수 없을 때가 있다니!

나는 한동안 의욕상실과 우울 속에 있었다.

평생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이 안 그려지다니!
사람이 먹고 자고 웃고 쉬고 화내고 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사소한 것들조차 사라지고 회벽처럼 무미건조하게 차가워지는 그런 때가 내 삶에 찾아왔다.
한 번으로 그칠 줄 알았지만 진하게 한번 그리고 좀 약하게 한번. 그렇게 찾아왔다.

가만히 있어보기로 했다.

그 수렁 속에서 가만히 들어 올려질 때가 있을 거라 믿고 내 의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괴롭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다.
나의 자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자꾸 고개 들어 뭐라도 해야 한다고 파닥거렸지만
나는 묵묵히 시간을 보냈다.
나를 내려놓고 나의 무능력을 받아들이고 어렵지만 그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때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나의 살고 죽는 것. 그리고 밥숟갈을 뜨는 작은 의지조차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았다. 진실 앞에 서고 거짓을 버리고 나 스스로를 대면해야 했다.
뻔뻔하고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숨어있던 내면의 자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기도조차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꺾인 채로 수렁에서 끌어올려지길 기다렸다. 그럼에도 일상을 유지해야 했고 삶은 진행되었다.

전혀 뜻밖의 어느 날 다시 일으켜 세워졌다.
이유 없이 특별한 일 없이 가만히 들어 올려짐을 느꼈다.
나의 어떤 의지나 노력, 능력도 아님을
여실히 느끼면서 서서히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평범"이라 느꼈던 일상이 "비범"이 되었다.
"당연"했던 것들이 "특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산을 하나 넘었다.

마음을 담고 싶은데 담아낼 마음이 없을 때
가을에 한번 잠겨보기를.

괜찮아, 가을이에요..

*위에 게재된 그림은 제가 직접 그린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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