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생활(시리즈 1.)

피천득처럼.

by You앤Me Art Place

나의 사랑하는 생활.

피천득.


그의 글을 접한 건 중학교 때였다.
교과서에 어엿이 실린 글.
한꺼번에 교과서를 몰아 받아 온 날이면 젤 먼저 국어책을 펼쳤다. 그리고 미술책.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어와 미술.
내 하루를 든든하고 기쁘게 해 준 교과서를 한 장 한 장 넘겨 읽노라면 참 행복했다.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
김춘수의 꽃.
황순원의 소나기.

좀 길다 싶은 곱슬머리에 마르고 키 껑충한
첫 교생 국어 선생님이 신기하고 신선했다.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고 같은 제목 다른 느낌으로 자신만의 글을 써오는 것이 대단한 과제로 주어졌다.
남자 어른이 썼다고는 안 믿기는 순수함에 끌려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어대면서 어떤 것은 내 생활과 어떤 것은 내가 꿈꾸는 생활과 매치되었구나 싶었다.

반은 들떠서 또 반은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써 내려간 숙제. 한 구절 한 구절이 샤프펜을 쥔 손보다 빠르게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되어 전개되었다.
상상의 기쁨 상상의 즐거움 그때 기분이 딱 그랬다.
게다가 제목이 너무도 맘에 들었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이라니.
지루하고 따분하고 피곤한 나의 생활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제목 하나에 왜 가슴이 뛰는 걸까.

나를 따로 부른 교생 선생님은 무표정으로 대뜸 물었다.
이거 니가 쓴 거 아니지? 어디서 베낀 거지?
첨엔 뭔 말인지 몰랐다. 네? 네에? 네에...?
'칭찬해주려고 불렀나' 잔뜩 기대하던 나에게 제대로 멕이는 칭찬을 하신 것 같다.
기분이 순간 덜컥 나빴다가 다시 멍청하게 있다가 아니에요! 제가 쓴 거 맞아요! 제가 느낀 대로 쓴 거예요! 그럼에도 갸우뚱하더니 다른말은 안 해주고 과제물만 건네 받는다.
교무실을 나온 뒤에야 아아.. 내가 진짜 잘 쓴 건가? 떫떠름했다.
그래도 그렇지... 참 매력 없는 교생이다...

그때 내가 중1인가 그랬나 잘 기억은 안 난다. 다만 몇 가닥씩 생각나는 내가 썼던 나의 사랑하는 생활. 중학교 때 쓴 그 글을 애써 기억을 끌어올려 다시 써본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나는 친구들의 수다가 좋으며 짹짹 거리는 참새 소리를 좋아한다.
웃을 때 경쾌하게 크게 웃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그 친구를 더 좋아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길 가다가 남의 집 울타리 밖에 서서 맡아보는 짙은 장미향을 사랑한다.

나는 겨울 오밤중에 깨어 아빠가 사다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 추운 날 감기 드는데 자는 애들 깨운다고 엄마가 뭐라고 해도 아빠가 나를 깨워 먹고 자라고 하면 비몽사몽 일어나 따뜻한 이불속에서 맛있게 먹는 차디찬 아이스크림 맛을 좋아한다.
더운 여름에 먹는 하드맛보다 훨씬 맛있다.

나는 멋진 가을 코트를 입고 쓸쓸하게 긴 생머리를 날리는 여인의 옆모습이 멋있으며 나도 커서 저렇게 예쁘고 싶다고 바란다.
잘 익은 홍시감의 그 다홍색이 좋으며 귤색도 주황색도 아닌 그 다홍색의 단 홍시감 맛이 너무나도 좋다. 특히나 겨울이 되도록 나무에 따지 않은 채 붙어서 눈을 맞고 살얼음이 붙은 시골 외갓집의 홍시감 맛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구수한 누룽지 냄새와 그 맛을 사랑하며 따뜻한 숭늉 마시는 것이 좋고 이모할머니 잠옷에서 풍겨 나는 이불솜 같은 냄새를 맡는 것이 좋으며 하얀 구름 같은 머리카락의 이모할머니를 사랑한다.

나는 바나나의 향기와 맛을 좋아하고 어렸을 땐 바나나 장수와 결혼할 거라는 꿈을 꾸기도 했다. 여름에 맴맴 매미소리를 들으며 외갓집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커다란 복숭아를 따서 손에 단물이 줄줄 흘러내리도록 껍질을 까고 먹는 뜨뜻해져 있는 복숭아와 여름을 사랑한다.

방바닥에 누워 시를 쓰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열 장씩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피아노의 선율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좋으며 헤드폰을 꽂고 들으면서 지휘자 흉내를 내거나 바이올린 켜는 시늉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다.
심청전 토끼전의 판소리 듣는 것이 재미있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가을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위를 밟는 것이 좋으며 그 소리를 들으며 걸을 때 행복하다.
단풍잎의 색깔이 좋으며 책갈피에 꽂아 말려두었다가 깜빡하고 잊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할 때의 그 기쁨을 사랑한다.
주머니에 과자를 넣고 걸어가면서 하나씩 몰래 먹는 것이 좋으며 나는 초콜릿을 사랑하고 그 부드러운 맛과 녹는 맛 그리고 초콜릿의 색깔을 좋아한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쓰고 비옷 입고 걷는 것이 좋으며 우산을 여러 개 겹쳐 아지트를 만들고 친구들과 그 안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을 사랑한다. 아늑하고 포근한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몰래 사 먹던 달고나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쉬는 시간이면 나와서 사 먹던 딱딱한 고구마 과자의 맛을 좋아한다.

겨울에 엄마가 해주신 찹쌀떡을 연탄불에 구워 먹던 그 느낌이 좋으며 군고구마 냄새와 호호 불어먹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봄이면 학교 앞에서 파는 뿅뿅 병아리들을 좋아한다. 보송보송한 노란 솜털과 햇볕에 졸고 있는 내 손 안의 병아리를 사랑한다.

대충 이런 글을 썼던 것 같다.
지금 다시 더듬어 써보니 역시 그 나이에 먹는 것 위주였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건조하다 생각되는 일상에서 한 번쯤은 나의 사랑하는 생활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다시 읽어보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나만의 글을 써 보시길 추천한다. 없던 행복도 생기고 생기가 올라와 별로였던 일상이 이만하면 괜찮다 싶어 질지도 모른다.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 문학소녀로 돌아간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다시 쓴다면 나는 또 어떻게 쓰게 될까.
그때 상상하던 핑크빛 어른시절에의 동경과 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건가.
상상하는게 전부였던 중학생 소녀시절.
나의 사랑하는 생활은 어설픈 듯 황홀했다.

*게재된 사진과 그림은 제가 직접 찍고 그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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