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3
‘이혼(離婚)’은 부부가 혼인 관계를 소멸하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행위이다. 법적인 혼인 관계를 종료시키는 행위는 당연하고, 법적으로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혼한 것과 다름없이 남남처럼 사는 것을 ‘사실상 이혼’이라고 한다. 반면 법적으로는 이혼하였으나 사실상 혼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서류이혼’, ‘위장이혼’이라고 한다. 이혼의 다른 말로 ‘파경(破 깨진, 鏡 거울)’ 또는 물건에 빗대어 ‘반품(返品)’이라는 표현도 쓴다. 이혼이 일상화된 시대에 뒤떨어진 비하적인 표현이라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법적 이혼 과정에 따라 협의 이혼과 재판 이혼으로 나뉜다. 협의 이혼은 쌍방 간에 이혼 여부, 자녀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 재산 분할 등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지면 별도의 소송 과정 없이 이혼이 되는 것이다. 반면 재판 이혼은 별도의 절차를 밟아 배우자를 상대로 법원에 이혼소송을 청구하는 방식이다. 이혼 여부, 친권과 양육권, 재산 분할 등에 대해 협의가 되지 않을 때 법의 도움을 받아 이혼하는 거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이혼 문화를 살펴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운 일부일처제였다. 재혼한 여성의 자녀도 차별 없이 사회활동이 가능한 남녀평등의 시대다. 이혼한 여자는 친정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면서 또 다른 좋은 혼처를 찾아 재혼할 수도 있었다. 한편 모계 중심의 문화가 남아 있어 사위가 노동력을 제공하며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많았고, 처가의 호적에 올리기도 했다.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균분 상속하여 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모든 일상생활에서 남성과 여성이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여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사회적 제한은 있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사회로 변하면서 여인에게 가혹하리만큼 불평등한 사회로 변했고, 이혼 문화 역시 여인에게 차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아내를 내칠 수 있는(이혼) 사유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었다. 첫째, 아들이 없음(無子). 둘째, 음행(淫行). 셋째, 시부모를 섬기지 않음(不事舅姑). 넷째, 말이 많음(口舌). 다섯째, 도둑질(盜竊). 여섯째, 투기(妒忌). 일곱째, 나쁜 질병(惡疾)이 있는 경우이다. 다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칠거지악을 범하였어도 내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삼불거(三不去)라 했다. 첫째, 시부모의 상을 함께한 경우(經持舅姑之喪). 둘째, 시집왔을 때는 가난했는데 그 후에 부자가 된 경우(娶時賤後貴). 셋째, 내침을 당해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有所受無所歸)이다. 최소한의 여성 인권 보호 조건이다. 하지만 내칠 수 있는 창은 7개를 주고, 자신을 지켜줄 방패는 3개를 준 격이니 여인에게 불리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와 비교해보면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여자가 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 존재한다면 천연기념물이거나.
이혼의 통상적인 이유로 성격 차이, 경제적 문제, 배우자 부정, 가족 간 불화, 정신적·육체적 학대 등이 있다. 법원에 접수된 이혼사유서에 기록된 절대다수가 ‘성격 차이’라고 답하지만, 역시 믿을 게 못 된다. 실제로는 경제 문제가 가장 많다. 이혼 사유 중에서 친자 불일치나 배우자 외도, 성적 취향, 폭력이나 돈 등의 문제는 타인에 밝히기 난처하기 때문에 성격 차이라 무난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이혼 사유는 결혼 전에는 좋은 점만 보이고, 결혼하여 살아보니 나쁜 점만 보인다는 것이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에도 결혼한 부부의 세 쌍 중 한 쌍은 이혼하고, 이혼한 부부 세 쌍 중 한 쌍은 황혼이혼이다. 거기에 사실상 이혼 상태인 쇼윈도 부부와 졸혼까지 합하면 세 쌍 중 두 쌍은 이혼 상태일 거다. 실제 유럽이나 미국 등은 이혼율이 우리의 두 배가 넘는다. 정말 이혼 대중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세월이 좀 지났지만,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가이드에게 들은 얘기다. 프랑스의 보통 남자들은 부인이 셋이란다. House wife, Office wife, Travel wife. 이렇게 살면 이혼이 없어지려나? 프랑스는 이혼율이 55%(2018년)로 세계 9위권인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70%가 넘는 벨기에다. 최근에는 부부가 갈등을 참지 않고 이혼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져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성향이나 가치관, 생활 습관 차이에 따른 충돌과 다툼이 불가피하다. 이게 반복되고 당사자들이 이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하면 결국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조사에 의하면 부부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이혼율이 높아진다는 보고가 있다. 황혼이혼이 증가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늘 붙어 있다고 사랑만 새록새록 쌓이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지 않은 미움의 감정이 더 쌓일 뿐이다.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도 생기고 애틋함도 커진다. 젊은 시절 주말부부 할 때처럼 오랜만에 만나야 반갑지 않던가. 매일 보는 사람이 뭐 그리 반갑겠는가. 치열한 사회 현장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은퇴자의 처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다.
특히 전체 이혼의 30%가 황혼이혼일 정도로 증가하는 것은 과거에는 “기왕 지금껏 살아온 거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하고 참고 사는 추세였다면,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 수명도 늘어났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고 성격도 안 맞는 배우자와 수십 년을 더 살라고?”라는 식으로 인식이 바뀐 측면도 있다. 황혼의 여성들에게 지금의 남편과 앞으로 30~50년을 더 살라 하면 모두 기절초풍해 죽을 일이다. 황혼이혼 성향이 증가함에 따라 최근 새로운 형태의 이별인 ‘졸혼’이 나타났다. 졸혼이란 ‘결혼을 졸업한다’라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결혼의 의무를 벗어나지만, 부부관계는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혼과 차이가 있다. 하여튼 오죽하면 노년의 남자들에게 ‘이사 갈 때 조심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혼 수준이 아니라 폐기 수준이 되었으니, 마누라 치맛자락 꼭 잡고 살라는 말이다. 강아지보다 못한 이 땅의 노년 남자들이여, 사는 날까지 굳세게 버티시기를~!
이혼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자립만 가능하다면 긍정적이고 좋은 점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자유로의 귀환, 복잡한 인척 관계에서의 해방, 제2의 인생 설계,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 내려놓기, 위험하지만 또 한 번의 기회 등 오롯이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함께 살기에는 이미 선을 넘었는데 미련하게 참고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않는가.
우리의 삶에서 결혼이 반드시 인생의 숙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혼도 비혼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고, 결혼의 실패가 이혼이 아니다. 함께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결혼의 실패가 아닌 이혼의 실패이다.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하는 것이 지금부터라도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다. ‘결혼에 실패했다.’라는 말보다 ‘이혼에 성공했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을 어쩌랴. 이혼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이혼이 위로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축하할 일이라는 뜻이 아닐까? 이런 이혼에 더 이상 주홍글씨의 꼬리표를 달 일도 아니다. 요즘 미디어도 드라마도 글도 이혼이 대세고 인기도 최고다.
사랑이 문제이든 결혼이 문제이든 깨진 유리구두 이어 붙이려 긴긴밤 눈물 쏟지 말고, 이혼에 성공하여 화려한 싱글, 자유로운 영혼으로 귀환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