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어디가, 지혜야? 화장실 가니?"
엄마는 나를 부른다. 그런가 보다 한다.
나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움직일 뿐이다.
화장실에 들어간다. 나와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잔털이 바짝 섰다.
아, 잠옷차림인가.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걷는다.
"천 원이요."
주인아저씨는 내가 내민 과자에 가격을 말해준다.
아직도 몽롱한 상태의 나는 아저씨를 흐릿한 눈으로 보다가 대답한다.
"아, 돈이 없네요. 다시 올게요."
귀신같이 스르륵 슈퍼를 나온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눕는다. 잔다.
기억은 나지만 왜 그랬는지 모른다.
"지혜야.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일어나.""
엄마의 목소리에 잠이 깬다.
그 사고가 난 뒤, 우리는 1층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누군가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초등학생이 되었고, 선명했던 기억이 흐릿해져 갔다.
아마도 2년 정도 지난 것 같다.
"안녕하세요."
옆 집 할아버지다. 잿빛 머리칼에 더 진한 잿빛 눈동자를 가졌다.
폐지를 주우신다.
리어카에 싣고 가신다. 그 뒤를 따라 한 두 개씩 떨어지는 폐지를 몇 번 주워 줬다.
그게 예뻐 보였을까. 아님 안쓰러웠을까.
가끔, 나와 엄마를 숨겨준다.
사방엔 폐지와 쓰레기로 가득 찬 곳에 몸을 숙이고 있으면 절대 아무도 못 찾을 것 같다.
안정감을 준다.
마치, 엄마 뱃속처럼 포근하다.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순 없겠지.
"그래, 학교 가니?"
가래가 목에서 덜렁 거리는 소리가 함께 나온다. 좀 뱉으시지. 아예 목소리와 합체된 걸까.
그래도 말투는 다정하다.
"네... 혹시 이따 엄마 없으면 라면 먹으러 가도 돼요?"
"그래라."
엄마의 기척이 없는 날이 종종 있다.
하루 이틀 후에 올 때도 있고, 밤에 올 때도 있다. 아마도 날아가고 싶겠지.
자꾸 내가 눈에 밟히나 보다.
왜 도망가지 못할까? 나 때문에? 다리 때문에?
절뚝거리는 다리에 맞춰 어깨가 들썩 거리며 엄마가 따라 나온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는 마네킹 다리처럼 얇고 굽었다.
아빠는 늘 병신이라 욕한다. 난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싫다.
내가 뭘 또 깜빡했나 보다.
"준비물 챙겨 가야지."
뭘 챙겨주는 엄마 모습이 좋다. 눈에 가득 담아 심장에 꾹 눌러 담는다.
안쓰럽다. 불쌍하다. 나만 아니었으면 벌써 날아가 행복했을 텐데...
씩씩하게 다시 인사하고 학교를 간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엄마?"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그녀는 어디를 간 걸까.
식탁 위 노란색 종이가 하나 보인다.
[엄마, 시장 갔다 올게]
날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된다.
아, 도망가진 않았구나.
자연스럽게 가방을 바닥에 던져놓고 옆집 할아버지네로 간다.
"할아버지."
"왔구나. 들어와라."
계란이고, 파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정말 딱 라면.
물에 면, 딱 그대로의 맛. 맛있다.
배가 고팠나, 사랑이 고팠나, 편안함이 고팠나.
가래와 목소리가 끌끌 대며 나온다.
"엄마는 어디 갔니?"
"시장 갔대요. 먹고 바로 가려고요."
난 명랑한 척 대담한 척 대답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래. 다행이네..." 그는 들리듯 말 듯 속삭이듯 말한다.
"잘 먹었습니다. 할아버지, 저 갈게요. 감사합니다."
빈 그릇을 싱크대 안에 넣고 물만 살짝 부어놓는다.
아직 설거지까진 서투르다. 상만 행주로 닦아놓고 나온다.
"조심히 가라."
옆집 할아버지는 별말 없이 친절하다. 아무래도 내가 불쌍한가 보다.
부모님이 매일 싸우는 통에 어지간히 시끄러울 텐데. 인내심도 대단한 거 같다.
아빠와 싸워봤자 안 될 거란 걸 아는 듯하다.
어느 날은 경찰이 한 번 왔었다.
경찰은 싸움만 말리고, 싸우지 말라하고 돌아갔다.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겠지.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안 다음으로는 그냥 참는 거 같다.
그날 밤,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근데 기억은 난다.
자다가 일어나서 물을 벌컥, 마신다. 한통을 모두.
"지혜야, 목말라? 왜 그래?"
인기척에 놀라 나온 엄마가 묻는다.
최면에 걸렸다 깬 것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맞혀진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식탁 위 유리컵에 비친 내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입 주변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통을 식탁 위에 놓는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든다.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눕는다.
기억은 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몽유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