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생각은 죄가 아니니
미련 없이 걸으면서도 뒤통수가 따가워 몇 번이나 돌아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일렁이는 마음을 감추며 대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종복이 평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색시야! 뭐 한다고 인제야 온 것이여? 보고 자파서 시방 숨 넘어가는디이―”
다가온 그는 연순이를 덥석 껴안았다. 눅진한 숨결이 연순의 목덜미를 덮쳤다.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옆구리에서 가슴까지 바쁘게 탐했다. 밀착한 하체는 더욱 단단해졌다. 허겁지겁 매달리는 그의 손길에 연순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이, 누가 보면 어쩔라고 그러요… 진짜 남 부끄러서.”
그물에 갇힌 새처럼 빠져나가 보려 애를 썼지만 그는 한번 잡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 짐승이었다.
“누가 보면 어쩐다냐? 우리는 부분디.”
종복이는 더 강하게 휘감으며 얼굴을 그녀의 뒷덜미에 묻고는 이제야 살겠다는 듯 숨을 흠뻑 들이마셨다. 연순이의 살에서 나는 단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것이 그를 더 안달 나게 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누르지 못한 종복은 연순을 방으로 이끌었다.
“아이, 나 이제 저녁밥 해야 하는디…”
다시 한번 종복이를 물렸다.
“아, 오늘 엄니랑 아부지, 저 짝 마을에 잔치 있다고 거기 가셨단 마다. 이 집에는 너랑 나 둘뿐인께 걱정 말어야. 내가 얼마나 니를 기다렸는디! 오늘 내 밥은 너 란께.”
그는 씩, 웃었고 연순이는 그 웃음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이 남자의 허기는 왜 이리 끝없을까? 언제쯤 다 채워질까? 눈 깜짝할 사이 벗겨낸 그는 성난 짐승이 되어 마구마구 헤집었다.
연순이는 그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신음하며 오는 길에 마주쳤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설렜다. 그의 단정한 시선 때문에 잊고 있던 여자의 마음이 떠올랐고 그것이 당황스러웠다.
그게 얼마나 오래된 감정이었나? 아니,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위에서 포효하는 종복이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그래. 내가 잠깐 미쳤던 거여. 혼자… 생각만, 생각만 해본 거여.’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니니. 생각은 죄가 아니니까. 그럴 테니까. 연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그 시각, 마을 입구 사장 나무 아래에서, 정순이는 창석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둑해질 무렵, 저 멀리 창석이가 먼지 가득 묻은 옷가지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창석이를 보자마자 끓어오르는 불을 겨우 억누르고 달려갔다. 창석이는 씩씩대며 달려와 눈앞에 이른 누나를 보자, 곶감 먹다 들킨 아이처럼 놀란 눈치였다.
“으흠… 흠. 작은누나가 여기까지 뭔 일이단가?”
“너! 오늘 어디 다녀오는 것이여?
“어디긴? 학교 다녀오는길이제.”
어색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거짓말 그만해라이!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혀. 오늘 두 귀로 다 듣고 왔은께!”
창석이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
눈을 내리깐 창석이는 애꿎은 돌멩이만 찼다.
“너, 진짜! 이렇게 살 거여? 아부지도 아프시고! 엄니는! 혼자서 약값 댄다고 쌔가 빠지게 일하는 거 안 보이냐? 이잉?”
“…….”
“장남이란 놈이 정신 못 차리고 이라믄 쓰겄냐? 도대체… 왜 그라는 건데… 왜!”
정순이는 결국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장남이니께 그런 거 아니여. 내가, 장남 노릇해야 하니께 그런 거 아니냐고!”
창석이도 울분을 쏟아냈다.
“뭔 소리냐? 그게 뭔 소리냐고!”
“아부지 나 때문에, 나 같은 놈이 뭐라고! 학교 보내겄다고 일하다가 쓰러진 거 아니냐고… 누나는, 엄니가 콩새 할머니한테 돈 꾸러 갔던 것은 모르제? 내가 그 돈으로 어떻게 속 편하게 학교에 다니것는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그간 맺힌 말들을 한데 모아 꾸역꾸역 토해냈다.
“작은누나, 나는 어차피 공부는 아니여. 애시당초 공부는 취미도 없고. 우리 집처럼 없는 형편에 학교를 다닐라믄, 잘하는 놈이 다녀야제. 만석이도 내년부터는 중학교 들어갈건디 그놈은 어쩔란가? 농담 따먹기 하듯 맨 일등만 하는 놈을… 배울라믄 그놈이 배워야제.”
넷째 만석이는 집에서 공부하는 꼴을 못 봤어도 일등을 놓쳐본 적 없는 아이였다. 누나라는 이름으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던 날들이 지나갔다. 그 짐은 저만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창석이 어깨에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도… 어째 니가 나서서 돈을 번다고 그르냐.”
“엄니한테는 안 그래도 엄니 속 시끄러운께 말하지 말어. 다 내가 알아서 할란께. 칠성이, 그 아저씨가 나보고 뺑키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하대. 내가 그림 좋아하는 것 누나도 알지 않은가? 나는 그 아저씨 따라 댕김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기술 배우고 나중엔 그림도 배울 거여. 언젠가 읍내 극장에 내가 그린 간판 하나 꼭 걸어 볼라네.”
종이만 있으면 버릇처럼 그림 그리던 동생임을 알기에 정순이도 더는 말하지 못 했다.
“앞으로는 그 옷, 니가 빨지 말고 나한티 줘라이. 알았지야?”
창석이에게서 옷가지를 뺏어 든 정순이가 말했다.
맹꽁이 울음소리가 가득한 논둑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언제 창석이랑 함께 걸어봤더라,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동네에선 밥 짓는 냄새가 짙어가는데 해가 길어진 여름의 저녁노을은 그제야 살굿빛으로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