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리 지금 다른 나라에 온 거 맞지? 다른 행성 아니고? 아이슬란드와의 첫대면은 나에겐 조금 공포스러웠다. 화산으로 인해 어둑한 토양, 지나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스산한 새벽 도로, 끝이 없이 펼쳐진 대지에 흩어져 있는 우락부락한 바위들, 그 땅에 맞닿을 것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은 진회색 먹구름까지.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미지의 행성에 착륙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 우리 눈 앞의 광경도 누가 아이슬란드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지구가 아니라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낯설었다. 괜스레 산소의 농도가 변한 것 같질 않나, 중력도 묘하게 강해진 것 같질 않나.. 갑자기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내가 아이슬란드를 밟아보는 날이 오다니 하며 감격에 날아오를 지경이었던 나.
그러곤 아이슬란드의 첫인상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슬란드의 여름에 볼 수 있는 백야현상은 우리를 더욱더 미지의 세계에 온 기분이 들게 한다. 공항에서 나와 렌트카에 오른 시간이 새벽 2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깜깜한 밤이었을 시간이나, 이곳 아이슬란드의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음에도 아직 애매한 햇빛이 감돌고 있었다.
공항을 나서자 마자 찍은 새벽 2시의 하늘
아이슬란드는 이번 여행에 작은 가방만 챙겨온 것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잠시나마 후회를 하게 만든 나라이다. 우리가 입고 있던 얇은 겉옷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 온 시기가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괜히 나라 이름에 아이스가 들어가는 게 아닌지라 저녁이 되면 7~8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간다.
설상가상으로 하필이면 아이슬란드에 오기 직전 우리 둘 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린 데다, 도착한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추운 때였다. 거기다 아이슬란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틈만나면 비를 뿌려댔다. 요상하게도 비는 우리가 밖에 나갈 때만 기다렸다가 '이때다 요놈들'하고 퍼붓고는 차 안으로 도망치면 얄밉게도 시치미를 뚝 떼며 멈추는 것이었다. 목도 붓고 코도 막힌데다 비까지 맞으니 기분마저 축축해졌다. 챙겨온 약도 먹고 렌트카 안에서 히터를 틀고 수시로 몸을 녹였지만 나도 점점 컨디션이 떨어지고 남편도 목구멍이 부어 쉰 목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경악스러운 아이슬란드의 물가 또한 컨디션 난조를 부추겼다. 도착하여 먹은 첫끼니가 공항 근처 작은 마트에서 산 바나나 두개, 빵 한개, 성인남성 주먹만한 작은 레토르트 컵카레밥이었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이 넘게 나왔으니. 이를 미리 알고 나름 대비해서 비상간식, 라면 등을 챙겨오긴 했지만, 이 물가를 직접 피부로 느끼니 맥이 풀렸다.
나>> 여보야.. 나 어떡해. 파리 레일라 언니네 집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으앙.
먹어도 간에 기별도 안가는 쬐끄만 빵과 아담한 카레밥을 처량하게 아껴 먹었다. 도착한지 몇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따수운 밥과 보금자리가 그리워지다니. 몸이 아프니 정신까지 나약해진다.
"우리 이러지 말고 좀더 힘내 보자! 여기까지 와서 아프다고 아무것도 안할 순 없잖아."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비장하게 여정을 나섰다.
마주하면 자연스레 비장해질 수밖에 없는 광경
이런 우리의 노력에 하늘이 감복한 걸까? 겹겹이 내려앉았던 먹구름이 조금은 걷히고 부드러운 햇살이 빼꼼 얼굴을 내비친다. 아이슬란드의 아침이 오고 있었다.
알마나기야(Almannagjá)
알마나기야(Almannagjá)협곡은 단층이 갈라진 틈을 걸어볼 수 있는 장소이다. 거대한 땅이 갈라진 단면이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고 있자면 먼지보다도 하찮은 우주의 미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
꼬마 협곡도 있다.
높이 펄럭이는 아이슬란드 국기
아이슬란드는 이국적인 것을 넘어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더 넓은 세상을 배우려 시작한 세계여행이지만 그중에서도 아이슬란드는 '그동안 두눈으로 보아왔던 세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준 장소이다.
빙하의 냉기를 그대로 녹여낸다면 이런 색일까 싶은 신비로운 물색깔의 폭포 브루아르포스(Brúarfoss).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주위를 걷는 사람들을 한순간에 개미떼로 만들어 버리는 폭포 굴포스(Gullfoss). 그 낯선 풍경은 우리를 지극히 겸손하게 만든다. 너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실 저 빙산의 일각이었고 그 아래에는 이 거대한 지구의 진면모가 숨어 있다고. 너희는 수년 혹은 수십년에 걸쳐 도시와 국가를 세우지만, 이 땅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아침에 산을 쌓고 대륙을 가른다고. 그러니 이 아름다운 행성의 주인은 자연임을 잊지 말라고 일러 주는 것 같았다.
브루아르포스(Brúarfoss)
굴포스(Gullfoss)
아이슬란드의 화산들은 활화산이 많아 이곳에 온다면 사실상 지반 아래로 들끓는 마그마 위를 걸어다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덕분에 간헐천이라는 보기 드문 자연현상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지하수가 마그마의 열기를 만나 끓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넘쳐 흐르면서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간헐천이 올라오는 순간을 찍는 노하우가 있다. 보통 물이 한번 솟아 오르고 나면 수면이 깨끗해지는데, 7~8분 가량을 기다리면 맑아졌던 수면 위로 가득 김이 서린다. 수면 위가 충분히 뿌얘졌다 싶으면 간헐천이 솟을 때가 된 것이니 카메라를 누를 준비를 하면 된다.
게이시르(Geysir)
간헐천 분출의 순간
다시 생각해 보니 이땅에 발을 디디면서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다'고 했던 말이 어찌보면 조금 우습게도 들린다. 내가 살고 있는 행성은 본래부터 이 모습이었건만. 코끼리의 다리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소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와서 지구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을 이제 막 하나 더 찾아 끼워 맞춘 기분이다. 그 모든 조각을 찾아서 큰그림을 완성하게 되는 날. 아니 꼭 전부가 아니라도 대부분을 맞추어, 흐릿하게나마 윤곽을 어렴풋이 그려내는 날. 그때까지 천천히 한걸음씩 더 나아가 보려 한다.
한 폭의 그림같은 두 사람의 말타기
여름의 아이슬란드에는 보라색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굴포스 폭포에서 찍은 셀카. 우리 둘 다 표정은 애써 밝게 짓고 있지만 실상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퉁퉁 부은 남편의 얼굴. 벌게진나의 코끝과 눈두덩이. 몸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남편은 슬슬 미열까지 났다.
소름돋는 아이슬란드의 물가에 맞서기 위해 카라반이 아닌 소형차를 빌렸고, 패기 넘치게 차박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온 우리였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하루도 못가 병원신세를 지게 생겼다. 우리는 결국 백기를 들고 부랴부랴 호텔을 예약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그대로 차 안에서 잤더라면 내내 골골대기만 하다 여행다운 여행도 못해보고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싼 호텔들로 열심히 검색하면 꽤 괜찮은 가격에 숙박을 할 수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두세배는 비싼 물가를 가진 아이슬란드임을 감안했을 때숙박비는 그나마 합리적인 편이었다.
호텔방에 체크인을 하고서차갑게 젖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말려두고는 바로 욕실부터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뜻한 물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녹여준다. 으어어 살았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화산의 나라답게 아이슬란드의 숙소들에선 온천수가 기본으로 나온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이슬란드는 집집마다 온천수가 나온다고도 하는데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뜨끈한 온천수욕을 하고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남편의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상당했다. 오한이 드는지 남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불과 담요를 전부 끌어다 남편 몸을 꽁꽁 감싸고 머리엔 찬 물수건을 올렸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남편은 더이상 떨지 않았고 나도 인후통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나마 호텔에서 푹 자서 이정도로 나아진 것이지, 안그랬으면 정말 크게 고생할 뻔 했다.
준비해 온 비상감기약이 벌써 간당간당 떨어져 갔지만 어쨌든 오늘을 살아야 내일도 있기에 아낌없이 챙겨 먹었다.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호텔을 나선다. 오늘은 아이슬란드 남부의 또 다른 폭포를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