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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탐험가 Aug 06. 2022

아주 전형적이고 전형적이며 전형적인 아시안이란 무엇이죠

여행 판타지가 만들어낸 망상 속의 그대



예전에 파리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후, 궁 안에 있는 카페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데 여자 종업원이 나에게 다가와 쪽지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내 친구가 너 전해주래!’라는 말과 함께. 영수증을 찢어 그 뒷면에 메시지를 남긴 쪽지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문한 거 계산 안됐으니 당장 이 계좌로 돈 보내시오’를 뜻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숫자의 조합이었다. 나에게 쪽지를 보낸 발신인은 계산대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 종업원이었다.


당시 나는 수용소마냥 작은 방에 2층 침대가 5-6개씩 들어차 있는 한인민박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날 밤 자기 전에 모두 모인 수용소 식구들은 나의 쪽지 에피소드를 듣고는 몹시 들떠서 ‘한 번 연락해서 만나보세요!!’라며 나를 부추겼다. 처음엔 여행자가 타지에서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뭐하나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주변의 반응과 파리라는 여행지가 만들어내는 오묘한 환상에 빠져서 나 역시 진짜로 연락해서 한 번 만나봐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비포 선라이즈> 꿈꿨다가 <테이큰> 되는 수가 있어. 너희 아버지가 너 구하러 가시기엔 이미 연로하시다. 자중해라.”


결론은... 1년 후 같은 날 같은 기차역에서 다시 만날 운명을 만들지도 않았고, 아빠가 날 파리까지 구하러 올 상황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간 고민을 할 때엔 ‘나에게도 혹시 운명 같은 일이 생기는 거 아닐까?’하는 ‘망상’을 했다. 물론 그것은 말 그대로 망상에 그쳤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일화의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여행지가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꽤나 유혹적이다’라는 것이다. 괜히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은 어딘가 남다를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여행이라는 요소는 '이 사람과의 만남은 운명일지도 모른다'라는 쓸데없는 망상의 꽃을 마구마구 피워낸다. 그리고 이전에 내가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만났던 그 독일인 여행자 마르셀이 이러한 ‘여행지가 만들어낸 판타지’를 품고서 나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내가 있는 도시로 돌아왔다.



장기 여행 도중 골드코스트에서 나를 만나 일주일간 함께 시간을 보내고 훌쩍 떠난 그 친구. 일주일간의 즐거운 기억과 아쉬움으로 나에게 눈물 파티를 열게 했던 그 마르셀이 어느 날 나에게 연락을 주었다.


“네가 괜찮다면, 내가 너를 다시 보러 가도 될까?”


한 달여 전에 헤어질 때 자신의 여행이 끝나면 다시 한번 나를 보러 오고 싶다고 하길래 ‘그때 가서 자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래도 좋다’라고 했던 그 말 그대로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의 방문 요청에 나는 ‘그러시오’라고 했고, 그는 정말로 이틀 후에 2000 km가 떨어진 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깁스를 한 다리를 절뚝이면서.


그는 여행 도중 발가락을 다쳐 깁스를 하였지만, 많은 친구들과 여행을 하는 이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깁스를 한 상태로 여행을 지속하였고, 급기야는 그 발을 한 상태로 스치는 인연이었던 나를 다시 만나러 왔다. 발도 다친 양반이 몇십 키로 짜리 배낭을 이고 지고 오는 걸 보니 반갑기도 하면서도 어찌나 마음이 불편하던지. 나는 다시 찾아온 그에게 이전보다 더 친절히 잘 대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만난 마르셀과 나는 한 달이라는 공백이 만든 어색함에 조금 민망하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전에 만났던 그때처럼 밥도 먹고 공원과 미술관도 가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어색했고 그 이후엔 친구를 다시 만난 듯 편했으나, 어느 새부터인가 나는 마르셀의 태도에 슬슬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멀리서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나를 방문해 준 그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에 내가 그의 몫까지 식사 값을 지불하려 하면 그는 10원 한 장까지도 더치페이를 할 것을 요구했고, 발을 다친 그가 괜찮은지를 물을 때면 그는 제발 자신의 발에 조금도 신경 쓰지 말아 달라며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그가 양손에 짐을 들고 있을 때 내가 짐을 나눠 들어주겠다 하자 급기야 마르셀은 나에게 버럭 큰소리를 냈다.


“엄마처럼 굴지 마, 난 네 아들이 아냐! 나도 이 정도 짐은 들 수 있다고!”

“???... 난 네가 발을 다쳤으니까 도와주려고 그랬지.”

“남자가 여자에게 짐을 맡기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발이 불편한 남자의 짐을 들어주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도 없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는 내가 그를 돕거나 그에게 호의를 베풀 때면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였고, 결국 나는 이 불편함을 참지 못 하고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라며 대화를 시도했다. 어느 순간부터 매사에 불안정하고 신경이 곤두선 마르셀의 태도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답변.


“사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전형적이고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아시안이야.”


아니 이게 무슨 대놓고 하는 인종차별스러운 발언이니...? 순간 분노가 치밀었는데, 이 거지 같은 답변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그는 골드코스트에서 나를 만난 후 한 달간 여행을 하면서 나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환상 속에서 나는 발을 다친 자신의 짐을 들어주는 엄마 같은 여자가 아닌, 속을 알 수 없는 난공불락의 차가운 도시 여자 따위였나 보다. 이전에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외국인 여자’라는 특수성이 그로 하여금 나를 특별해 보이게 했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것이 사실로 판명된 것이다.

그는 골드코스트를 떠난 이후로 나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나와의 재회에 엄청난 기대를 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기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결혼이라도 했어야 하는 것인가. 아무튼 나는 그가 기대한 ‘환상 속의 그대’가 아닌, 모성애 따위로 자신의 남성성에 흠집을 내는 아주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말야, 내가 떠나면 내 번호는 지워줘. 그리고 나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줘...”


내가 드라마 업계에서 일하는 게 지쳐서 이 먼 호주 땅까지 온 건데, 여기서 갑자기 혼자 드라마를 찍고 있는 남자를 보니 내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난 친절히 ‘너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으니 그런 걱정일랑 하덜덜 말라’며 그를 안심시키고 끝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그 끝이 불쾌하긴 했으나 그래도 그간 만나서 반가웠다며 예의 차려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그때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도착한 메시지 하나.

“잠깐만!”이라고 적힌, 자신이 떠나면 다신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바로 방금 전에 했던 그놈의 메시지였다. 문자를 확인 한 나는 내가 뭘 두고 간 게 있나 싶어서 그놈에게 되돌아갔는데, 글쎄 되돌아간 나를 보자 그놈이 대뜸 나를 끌어안고서는 내 귀에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굿바이, 치횽... 퀑치횽.”


발음하기 어렵다며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놈이 갑자기 내 귓가에 대고는 '아주 전형적이고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아시안’의 풀네임을 읊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며 사람 속을 뒤집어놓더니 갑자기 혼자 멜로 감정으로 돌변해선 왜 이러는 건지. 그는 도대체가 감정의 맥락과 흐름을 파악하려야 파악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아무튼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유러피언과의 만남은 반갑게 시작되었다가 황당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나는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가 만들어낸 여행 판타지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말이다.

마르셀과의 만남은 나에게 여행 판타지가 만들어 낸 불분명한 설렘과 망상은 몹시 경계가 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내가 그 망상을 하든 그 망상을 당하든지 간에 말이다. 하지만 나라는 망각의 동물은 이 교훈을 제대로 새기지도 못 한 채, 몇 개월 후 이번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 나만의 망상 속의 그대를 만들어내 버렸다는데...

(이 이야긴 언젠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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