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잔디'는 내게 금기어가 되었다. 내가 누군가 앞에서 소리를 내면서 운 것이 처음이었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내가 창피할 것이라고 느꼈는지 마치 내 흑역사를 감추어 주려는 듯 이후 내 앞에서 잔디와 관련된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정작 나는 그렇게까지 감정적일 수 있는 내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잔디를 그만큼 사랑했기에 후회는 없었는데, 사람들이 배려해주는 것이니 나도 자연스럽게 잔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생활은 여전했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봉사활동도, 과외도, 운동도 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러던 중 봉사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한 사진이 올라왔다.
처참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아이의 생활은 상상도 못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모든 강아지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어설픈 동정심으로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공고번호 2020-00416 이 아이는 어쩐 일인지 걷지 못했다. 아이는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도대체 너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커뮤니티에서 모금을 시작했고, 아이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입양처가 정해지지 않아 갈 곳이 없었다. 저 조그만 몸으로 철심을 박는 큰 수술을 견디고도 이 아이가 편히 쉴 작은 공간조차 없었다. 마침 나도 학기가 끝날 무렵이라 그간의 임시보호 경험을 바탕으로 임시보호에 자원했다.
집에 온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정말 작았다. 공고에 6kg이라고 되어 있어서 조금 덩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4kg보다 덜 나갔다. 이 추운 겨울에 털도 모두 깎은 이 작은 아이는 우리 집에 와서 내가 돌봐줄 것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내 무릎에 와서 앉았다. 나는 이 쥐방울 같이 작은 아이를 방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얼굴에는 진드기 물린 자국, 다리 쪽엔 고통스러웠을, 영원히 흉터로 남을 자국, 왼쪽 다리가 더 짧아 더 작은 왼쪽 발. 잔디도 소풍 가기 전에 혈관염이 생겨서 오른쪽 발이 더 커져 있었는데, 방울이는 다른 이유지만 잔디와 똑같이 왼쪽 발이 더 작아서 눈길이 갔다.
방울이가 나에게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녁에 남자 친구가 방울이가 왔다는 소식에 놀러 왔는데 방울이는 남자 친구를 보더니 책상 밑으로 도망가서 오줌을 지렸다. 방울이의 골절 원인에 대한 진단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 아닌 의도적인 강한 힘이었는데 왜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보통 작은 강아지라도 겁을 내면 근처에 오지 말라는 듯 사납게 짖기라도 하는데 방울이는 무력감이 학습되었는지 자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울이에겐 세상 모든 것이 무서웠지만 딱 하나, 내 품에서만큼은 편히 잠에 취한 소리도 내며 휴식을 취했다.
방울이는 차근차근 걷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귀여운 네 발로 친구들이랑 뛰어놀기도 하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가는, 이런 즐거움들을 천천히 알아가길 바랐다. 방울이는 나랑 함께 한 첫 순간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지 취향으로 이어졌다.
털을 모두 민 모습이 안쓰러워 옷을 입혀줬었는데 방울이는 그게 좋았는지 옷 입자고 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머리부터 들이민다. 언제는 산책을 하다가 목이 마를 것 같아서 종이컵에 물을 줬는데 그 물이 매우 시원했는지 집에서도 종이컵에만 물을 마시려고 한다.
방울이가 산책의 즐거움을 아는 데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잘 걷지도 못할뿐더러 산책을 나가서 남자를 마주치면 꼼짝을 안 했다. 머릿속에 깊게 박힌 기억이 쉽게 지워지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방울이를 포기하기 싫었다. 비록 방울이의 첫 세상은 끔찍했고, 이 아이에겐 평생 잊기 힘든 기억이겠지만 나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그 기억이 희미해질 수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방울이는 점점 산책의 재미를 알아갔고, 걷는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졌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방울이의 왼쪽 다리가 조금 더 짧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왼쪽 다리 근육이 훨씬 작지만 방울이의 다리 근육 힘은 점점 세져서, 몇 번의 실패 끝에 다리를 들고 쉬야를 하기까지 했다.
결정의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좋으면 꼬리를 위로 삭 말고 살랑살랑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멈추지 않고 흔들고, 무서우면 가랑이 사이로 꼬리를 숨기며 내 뒤로 숨는, 감정이라곤 숨기지를 못하는 이 작은 강아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방울이는 느린 아이라 적응도 느릴 텐데.
방울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두려움도 떨칠 순 없었다. 잔디를 한 번 잃어봤기에 방울이가 또 아프면 그땐 어쩌지. 난 강아지를 13개월만 키워본 사람인데.
그럼에도 방울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고, 나는 방울이 덕에 잔디는 이랬었지 하며 잔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나는 13개월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었다.
방울이는 그 해 마지막 날, 내 가족이 되었다.
방울이랑 정말 잊지 못할 행복할 시간을 보내면서도 방울이와 함께 지낸 지 13개월쯤 됐을 땐 방울이도 아파서 날 떠날까 봐 괜히 불안하기도 했다. 방울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며 지내고 있다.
너의 시간은 나보다 빠르니까 지금 아기인 너는 나보다 먼저 할아버지가 될 것이고, 늙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아프기도 하겠지.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받아들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할거야. 중간중간 너의 모습에 잔디가 생각나서 눈물 흘리는 날도 있겠지만 나는 너랑 잔디를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크기의 마음으로 사랑하니까 그런 날은 이해해줄거지? 아픈 기억으로 세상을 시작한 방울이가 좋은 기억으로 세상을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나는 우리에게 이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지금 널 보고 있어도 그리워. 내가 너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서 다행이야.
정방울, 코 끝부터 꼬리 끝까지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