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이 부릅니다)
인생의 한 부분을 색깔로 굳이 떠올려 보자면 회색이었던 적이 있다. 10대 후반과 20대 중반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아주 밝지도 그리 어둡지도 않은 딱 어중간한 색의 자신을 외부로 드러냈다. 정말 기쁜 일도 미리 주변에 알리지 않고, 힘든 일도 그저 혼자 감내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예로 대학교 때 장학금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도 부모님께 미리 알리지 않고, 다음 학기 최종 감면된 등록금 고지서를 마주하고서야 말씀드렸다. 기쁨을 공유하는 순간은 단 몇 시간. 어쩐지 나에게 다가온 행운을 미리 말씀드리면 새어나갈까 혹여 잘못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에서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 속상함을 혼자 쏟아내었을 때도 저녁에 가족들이 다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따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결혼소식을 회사에 알렸을 당시 출산계획을 미루는 게 어떠냐는 사장님의 부당한 말씀도 그저 혼자 삼켜냈다.
유아기에 지지와 격려보다는 무언가 잘 되지 않았을 때 모든 원인이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었을 때, 계속해서 성과가 나지 않으면 숨기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그저 감내하며 회색빛 감정을 지닌 어른이 되어갔다.
회색빛 인간이 제일 당황스러운 장소는 엄마가 다니시던 미용실이다. 엄마의 단골 미용실은 동네에서 소식통으로 불린다. 동네의 사건사고는 물론이고 이웃들의 택배까지 맡아주셨다. 그리고 미용실 원장님과 손님들의 시댁, 배우자, 자녀 등 좋고 나쁜 가정사가 모두 펼쳐지는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믹스커피를 타서 간식거리를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귀는 쉴틈이 없었다. 어느 장단에도 쿵짝을 맞출 수 없던 나는 듣는 편이 편했고, 이후 단골이 되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여전히 미용실 유목민이고, 꼭 갈 필요가 있을 때에는 프랜차이즈를 선택하곤 한다.
병원이나 상담 시에 점점 중요시되고 있는 '라포'는 심리학 용어로 친밀한 유대관계라는 뜻이다. 요즘은 심리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라포 형성의 유무가 어떤 활동이든지 해당 시간에 대한 밀도를 결정하는 듯하다. 학생이라면 과외, 헬스장에서는 PT, 필라테스에서는 개인레슨.
강사와 고객이 일대일로 50분간 같은 공간에서 필라테스라는 운동을 하는데 라포가 형성되어 있다면 몸을 움직이는 동안 마음의 건강까지 다뤄질 수 있음을 경험했다. 몇 해 전과 달리 요즘은 많은 필라테스 강사들이 개인레슨에서 고객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사님과는 5회 차 진행 중이었지만 그동안 같은 센터에서 오랜 기간 얼굴을 알고 지내어 스스로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는 회색빛 인간임에도 스몰토크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매 수업시마다 빠지지 않는 핵심 질문인 당일 컨디션과 직업, 가족관계 등 수면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까지 자연스럽게 말씀드리게 되어 신기했다.
라포가 형성된 이후의 수업은 그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강사의 큐잉에 내가 못하면 어쩌지라는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아닌 유머를 겸비한 큐잉에 무장해제된 채 편안하고 스스로 가능한 만큼 최선의 동작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힘들다고 소문난 운동에 유머는 오아시스의 사막과도 같았다.
볼을 조이면서 니스트레치 시작과 동시에 바디 스캔을 끝마친 강사님의 주문은 이어진다.
"음~ 골반을 알려드립지요. PSIS와 ILIUM을 고정해 볼까요오?"
글을 쓰라고 시킨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움직임을 주문한 강사님의 멘트는 계속되었다.
"프런트스플릿을 하십시오. 저는 Hip Joint를 보겠습니다."
마지막 풋바에 올려놓은 발가락을 향해 3단 콤보 큐잉이 쏟아졌다.
(최종) "세 번째 발가락도 참여해 보아요."
(최최종) "뒤꿈치 조금만 더 위로"
(최최최종) "Heel~~~~"
'혹시 이 노래 아시나요?'
방탄소년단이 부릅니다. (발목이) 불타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