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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Nov 04. 2022

결혼도 독립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스물여섯, 공대 CC는 부부가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육아하는 분들 중 오은영 박사님을 모르시는 분이 없을듯하다.

그리고 세 아이를 육아하는 사람인 나 역시 박사님의 책들로 책장 한 칸을 채워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영상에서 말씀해주신 양육의 목표를 듣고 양육과 독립의 연결고리를 알아냈다.


양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강한 독립입니다.



건강한 독립이라면 스무 살 이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거나 계획을 했겠지만, 내가 처음 마음먹은 독립의 목적은 탈출을 위함이었다.


어릴 적 아빠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은 결과, 사춘기가 될수록 더욱 서먹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대화를 하고 싶어도 일방적인 말씀이 길어지는 것이 두려워 여러 번 참았다.

사춘기가 되고부터는 아빠도 가장으로서의 삶이 고되셨는지 집에서 반주를 하시는 게 낙이셨고, 밖에서 술을 드시고 귀가하시는 날도 잦아들었다.

그런 날이면, 술냄새가 싫어 재빨리 소등하고 침대에 누워 자는척했던 날도 꽤 많았다.

어쩌다 깨어있어야 하는 날이면, 문을 열고 나가서 형식적인 한마디만 하고 다시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내 나이 고2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아빠가 술을 한잔 하고 들어오셨고, 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사춘기 소녀는 잠들지 않고 하필 깨어있었다.

귀가하시자마자 씻고 나오셨고, 소파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시며 일하시던 중 있었던 민원에 대해 말씀을 꺼내셨다.

아빠는 그 당시 쌓아오신 경력과 자격으로 저녁에 강의를 하셨고, 나는 객관적으로 그러한 민원이 왜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듣기만 하고 내 방으로 사라졌어야 하는 게 맞는데, 머리가 너무 커버린 걸까 아니면 가족으로서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는 소신이 생겼던 것일까.

30대부터 근무하셨던 업무 환경 탓에 청력이 많이 약해지셨던 아빠는 보청기를 하셔야 할 정도인데 전혀 생각이 없으셨다.

이러한 사항을 알고 있는 가족도 여러 번 말해야 대화가 겨우 되는 상황이 답답한데,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자신이 잘 들리지 않으니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주입식 교육의 세대이셨던 수업방식을 지속하는 점 등을 이때다 싶어서 말씀드렸다.

날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내 머리가 너무 커져버린 탓일까..

아빠가 들고 계시던 수건은 그대로 날아서 내 얼굴에 꽂혔다.




그 장면 이후의 아빠가 하신 말씀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략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식의 말씀이셨던 것 같다.

어쩌면 술도 한 잔 드시며 말씀을 꺼내셨던 아빠는 공감과 위로를 원하셨는지 모른다.

수건으로 맞은 게 물리적으로 크게 아플 것도 없지만, 그때 상처 난 내 마음은 꽤 오랜 기간 새살이 돋지 못하고 딱지가 되어 앉아있었다.

눈물이 나려는 상태로 방으로 들어가 버린 10대의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꽤 오래 울었다.

걱정되어 들어오신 엄마에게 모진 소리도 내뱉었다.


이후에 우리 가족이 변한 것은 없다.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정해진 시간에 등교와 출근으로 집에서 모두 사라졌다.

아빠는 여전히 일에 최선을 다하시며, 술을 드시고 보청기를 하지 않으셨다.

나는 여전히 아침 7시에 등교해서 밤 10시에 하교하는 일상이었다.

고1 때 수학 2등급을 받았던 나는 더 열심히만 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게 고등학교 내내 최고의 성적인 줄도 졸업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정서라는 바다(좋은 관계)에 인지라는 배(학습)가 항해하는 것인 줄 전혀 몰랐던 여고생 시절이었다.





지난 과거는 내가 할 말을 해서 이렇게 벌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난 할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그걸 여태 참고 있던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면 나는 독립이 쉬울 줄 알았지만, 대학교 다니며 4년 내내 아르바이트해서 내 용돈을 충당해내기 바빴다.

20살, 21살, 22살...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며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으며 나만의 마지노선을 잡았다.

스물여섯.


21살 여름방학에는 평소 알고 있던 선배와 꽤 오랜 시간 통화를 하며 친밀감이 쌓이고 어느새 연인이 되어있었다.

비슷한 듯 다른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졸업 후에도 아침에 조조 영화를 보며 주말마다 만나 4년의 시간이 쌓여오고 선의의 거짓말도 못하던 사람이 서프라이즈를 위해 날 속이고 프러포즈를 준비했던 날 우리는 앞날을 약속했다.



배우자는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한부모 가정으로 자라왔고, 상견례 자리에도 당연히 어머니와 시누이만 참석하셨다.

자리를 해주신 아빠는 인사치레만 하시고, 대화를 이어나가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

살얼음판 같아 너무나도 싫었던 그 자리는 내게 여전히 배우자와 어머니께 미안함을 안고 있다.


2014년 9월 결혼을 했고, 원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여전히 나는 시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다.

앞으로도 먼저 이야기해주기 전까지 먼저 묻지 않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 중요한 일은 어쩌면 타이밍이 전부였다.

내가 정한 마지노선에 함께한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눈치 없이 착했다.

앞날을 약속하고 독립을 이룬 우리의 새 가정은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저출산 시대에 20개월 터울로 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서로가 전우로서 매일이 눈물과 웃음 범벅이다.

이제 나와 남편은 진짜 독립, 아이들의 건강한 독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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