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고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그동안 한국경제 성장에 우호적이었던 대외 경제 환경이 비우호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경제의 체력이 떨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대외 경제 환경도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몸이 허약해졌는데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것과 같다. 향후 한국경제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총체적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는 IMF 외환위기(아시아 금융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 왔다. 그 중심에는 기업들이 있었다. 물론 IMF 외환위기는 기업들의 방만한 차입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은 기업들은 경쟁력을 회복하면서 200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다.
기업은 재화를 생산하고 고용을 담당하는 경제 주체이자 가장 많은 R&D 비용을 지출하는 혁신 주체이다. 기업은 가계, 기업, 정부의 3대 경제 주체 중에서 국가경제의 가장 핵심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라는 경제 주체는 항상 강건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기업이 부실해지고 경쟁력이 약화되면 국가경제의 위기로 이어진다. IMF 외환위기가 그랬고, 노키아 몰락에 따른 핀란드 경제의 침체가 그랬다. 또한 경제 위기 극복은 기업 경쟁력이 회복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 국민의 단합된 노력도 있었지만, 반도체, 통신기기 등 IT 기업의 경쟁력이 신속히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노키아 몰락 이후 핀란드 경제도 스타트업들이 노키아의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하면서 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경제의 침체가 지속되는 것은 디지털 투자 부족 등으로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 빠르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직면할 총체적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업 생태계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기업 생태계는 대기업,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 다양한 기업들로 구성된다. 기업 생태계의 경쟁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스타트업 창업(생태계 진입)이 용이하고, 생산적이며 혁신적인 기업은 계속 성장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자연스럽게 퇴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 생태계가 이처럼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국가 경제에 활력이 넘치고 위기 극복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막 생태계, 산림 생태계 등 자연 생태계가 자연환경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처럼 기업 생태계도 국가별 경제 환경에 적합하게 형성되고 성장한다. 각국의 기업 생태계에는 각국의 상황 및 각국 경제가 발전해 온 궤적이 반영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 성장과 기술 혁신을 주도해 온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기업의 생성-성장-쇠퇴가 활발했다. 그동안 많은 스타트업들이 창업되고, 그중 일부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기도 했다.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지금 미국에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의 1/4이 있고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의 절반이 있다. 미국의 기업 생태계에는 현재 경제를 책임지는 대기업들이 포진한 가운데 미래 경제를 이끌어갈 많은 스타트업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의 1/4 정도가 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수에서 미국과 중국은 이제 서로 대등해졌다. 유니콘 기업 수에서는 중국이 미국에 비해 열세이지만, 2010년대 이후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창업 촉진과 지원으로 중국에서도 유니콘 기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향후 미중 간 세계경제 패권 경쟁은 양국 유니콘 기업들 간 경쟁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다. 미래 혁신은 이들 유니콘 기업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주: 원의 크기는 각국 명목 GDP의 상대적 크기
(그림 4.4.1) 주요국의 유니콘 기업 및 포춘 글로벌 500 기업 수 비율
일본은 주로 1950년대 이전 창업된 기업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어 왔다. 이들은 일본경제의 버블 붕괴 이후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일본 기업 수는 1995년 148개에 달했으나 2024년에는 1/3도 채 안 되는 40개로 급감했다. 신성장 기업의 출현도 부진해 일본의 유니콘 기업 수는 전 세계의 유니콘 기업 수의 0.6%에 불과하다. 일본의 기업 생태계는 한마디로 기존 기업들의 성장이 정체 혹은 쇠퇴하는 가운데 새롭게 성장하는 기업들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독일은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기업 수가 1995년 42개에서 2024년 29개로 감소폭이 적고 유니콘 기업 수 비율도 2.5%로 일본보다 높다. 1995년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이 2024년 세계 4위로 밀려나고, 독일경제가 일본경제를 추월해 세계 3위로 올라선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될 정도로 큰 기업이 없다. 인구가 적어 내수시장이 협소하고 정착촌 공동체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해 오면서 대기업이 출현할 경제적 토양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들이 기술 창업에 나서면서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창업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 기업 생태계는 스타트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인구와 경제 규모가 작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의 3.0%,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의 1.1%가 있다. 한국의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수는 1995년 8개에서 2024년 15개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2023년 18개에서 3개가 탈락하고 신규 선정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좋지 않은 신호이다. 그동안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해 온 한국의 기업 생태계는 스타트업 비율이 높은 편이 아니다. 이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수 대비 유니콘 기업의 수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유니콘 기업 수는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수의 4.9배나 된다. 유니콘 기업들이 향후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후보군이라고 한다면 후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0.9배에 그치고 있다. 미래 한국경제를 이끌어나갈 후보 기업들이 많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향후 한국경제가 지속 성장하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업 생태계에서 스타트업, 특히 유니콘 기업의 비율을 지금보다 2~3배 높여야 한다. 미국과 유사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1: 각 사각형의 가로 폭은 기업 수에 비례
주 2: 숫자 = 유니콘기업 수 / 글로벌500대기업 수
(그림 4.4.2) 주요국 기업 생태계의 상징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