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겨울, 눈이 온다는 소식에 맞춰 일행 한 분과 함께 대피소를 예약하고 1박 2일로 설악산을 다녀왔다. 겨울 산행은 음식과 장비 외에 두꺼운 잠바까지도 챙겨야 해서 짐이 많다. 주말에는 등산객도 많고, 대피소 예약 역시 경쟁이 치열하므로 평일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대피소는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일 뿐 숙면을 취할 만큼의 시설은 아니다. 더군다나 누군가 코를 골기 시작하면 예민한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그대로 보내야 한다.
이른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지만 평일에 눈까지 온 탓에 대청봉까지 가는 길에 만난 등산객은 손에 꼽을 정도다. 등산객이 많으면 좁은 산길이 막히니 페이스 조절에 어려움이 많아서 힘이 든다. 그러나 같이 오르는 등산객이 없으면 위험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서 이것 또한 위험하다. 눈이 온 직후라 그런지 설악산을 통째로 빌렸나 생각했다. 걱정도 됐지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감사한 마음으로 거대한 산세로 들어갔다. 사람의 흔적이 없어 발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둘이서 묵묵히 걸어 올랐다.
산을 오를 때는 호흡이 거칠고 몸에 힘이 들어가니 말이 나오질 않는다. 땅만 보면서 그저 오를 뿐이다. 내 숨소리와, 쌓인 눈에 발이 빠지는 소리, 그리고 어디든 빈틈을 찾아서 내 몸으로 비집고 들어와 아는 체라고 하려는 바람이 내는 소리에 빠져든다. 그렇게 걷다 보면 걷고 있는 몸과 내 정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몸은 자동으로 걷고 있는 것 같고, 정신은 또렷해져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볍다. 등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걷고 있는 내 몸을 알아차린다. '내가 지금 산을 오르고 있구나, 집중하고 있구나, 잘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온전히 나를 느낀다.
불현듯이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이 가파른 길을 올라왔는지 아찔하다. 산봉우리의 그늘에 가려진 길은 이미 내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라고 한다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발을 잘 못 디뎌 멈추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기도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힘을 내서 출발한다. 우리 인생도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험난한 일들을 헤치고 이겨내서 지금의 여기까지 온 것이리라 생각한다. 걷고 있는 당장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대단한 족적을 남기며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발자취들은 너무 어긋나지 않도록, 혹은 어긋나더라도 나를 알아차려서 다독이고 응원하고 채찍질하며 일구어낸 것이리라.
한마디 말할 힘조차 아껴가며 도착한 정상에서 내뱉는 첫마디는 '와!' '우와!' '이야!'등의 감탄사다. 말로 풀어서 설명할 길이 없는 감정이기에 원초적인 외마디가 나온다. 그리고 정상에서 바라본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담으며 영원하길 바라는 그 순간을 아주 잠시 느낀다. 정상에서 오래 머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찢고 손발의 감각도 앗아간다. 제자리에 잠시 서 있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몸을 피할 곳도 없다. 정상은 온전히 맨몸으로 고통을 받아내야 하는 그런 곳이다. 우리도 살면서 정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정상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언제든 호시탐탐 노려지는 유지하기 어렵고 험한 외로운 곳이기도 하다. 외로운 정상에 오랜 행복은 없다. 다만 많은 이들과 함께 오른다면 서로 의지하며 갖은 풍파를 버틸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것은 고생이다. 이 힘든 일을 굳이 찾아서 하는 이유는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직 나, 그리고 나를 알아차리는 또 다른 나를 보고 느낀다. 그 덕분에 생기는 지난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낯설지만 익숙한,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