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점심 먹기 전 한가한 오전이었다.
예정되었던 프로그램이 강사 개인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 뭘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호식이 지만의 손을 잡아끌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 형님, 연이 씨 전화번호 딸까요.”
‘ 연이 씨 ’라는 호칭이 영 맘에 걸린다.
‘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연이 씨라고. 누님도 아니고, 치.’ 지만은 호식이 연이를 살갑게 대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그런데 호식이 연이의 전화번호를 따준다니 좋아해야 하는지 화를 내야 하는지 잠시 흔들리는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잠입성공!!
“ 여기 연이 씨 서류 있어요.”
진짜 연이의 서류철이 원장의 책상에 놓여 있었다.
“ 전화번호 부를게요.”
“ 적을 게 없는데.”
“ 아 저기 있네요.”
호식이 책상 위 필통에서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주었다. 대략 난감. 적을 종이도 없다.
“ 아이 참, 꾸물대기는. 어서 적어요.”
핀잔을 주던 호식의 입에서 숫자들이 흘러나온다.
“ 0-1-0-*-*-*-*-1-0-0-4.”
지만은 손바닥에 한 글자씩 번호를 적어 나가고 돋보기를 끼지 못한 호식은 서류를 가까이 멀리 움직이며 애써 전화번호를 따면서 낄낄 웃었다.
“ 앗싸, 연이 씨 전화번호 알아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겉으로는 호식이, 속으로는 지만이 기뻐하며 서류를 원래 자리에 두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원장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만은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내고 그 속에 있던 작은 수첩을 펼쳤다. 어지럽게 쓰인 전화번호 페이지를 넘기다가 깨끗이 비어 있는 페이지를 선택했다. 또박또박 연이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소중하게 적고 한참이나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 1004, 천사 ”
‘ 전화번호도 연이에게 꼭 맞춘 듯하다.’ 가방 깊숙이 소중한 물건인양 수첩을 넣고는 사물함 문을 닫았다. 소파로 돌아온 지만이 고개를 들어 연이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 분명히 아침에는 봤는데, 어디 갔나?”
궁금함에 지만이 연신 고개를 돌리다가 아뿔싸 효심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연신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들어 보이며 자랑 질 하고 있는 효심. 지만과 눈이 마주친 효심이 엉덩이를 흔들며 연이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워커(보행보조기)를 밀며 다가왔다. 그 순간에도 연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듯해서 지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남의 보행기를 밀면 어째 치.”
퉁명스러운 혼잣말을 입 밖으로 뱉으며 어디론가 피하려는데 마음 따라 뛰어야 하는 다리가 오늘은 더 움직이질 않는다. 어느새 효심이 다가와서 왼손에 반지를 들어 보이며 자랑 질을 시작한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지만은 주머니 속 이어폰을 양쪽 귀에 아무렇게나 끼우고는 못듣는 척했다. 아직 서툰 스마트폰 사용 때문에 아무런 음악도 찾지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지만은 효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머쓱해진 효심이 다른 무리들에게 가는 걸 보고 나서야 지만은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 오늘은 재미없는 하루가 될 것 같네.’라고 생각하는 지만은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