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전히 가슴을 누르는 돌덩어리가 치워지지 않았다. 답답한 지만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 회포를 풀 친구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몇 안 되는 동기들이 세상을 버린 지도 오래다. 평생 군인으로 떠돌며 살아온 지만에게 이제 남아있는 친구 한 명이 없다. 가끔 경로당에 나가봐도 쉽게 사람들과 친하지 못했다. 늙어가며 제 성깔 하나 다스리지 못해 개만도 못한 늙은이들과는 애당초 어울리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꽤 까탈 맞은 성격인 건 맞는 것 같다.
겨울이 깊어 나목이 된 가로수에는 누군가 입혀 놓은 나무 옷이 알록달록하다. 겨우내 나무의 추위를 막는 것은 물론 병충해를 막고 면역력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나무에게 옷을 입힌다고 들었다. 사람보다 나무가 더 관심받는 세상이라 생각하니 허허로운 기분이 살갗을 스치며 굽은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지만의 발걸음이 제멋대로 미술관 쪽으로 향했다. 도심을 약간 벗어 난 곳에 공연장과 미술관 체육관을 갖춘 복합시설은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는 맞춤한 곳이어서 지만이 종종 찾는 곳이기도 했다. 작년부터 무릎 관절이 심해진 탓에 운동은 할 수 없었지만 공연장과 미술관은 지만 혼자서 다닐만했다. 운이 좋을 때는 괜찮은 전시회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그의 발걸음을 향하게 하는 이유였으니 어쩌면 미술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기분 때문인지 오늘은 지팡이에 의지한 한걸음 한걸음이 유난히 힘에 부친다.
마땅한 전시작품이 없어서인지 미술관도 썰렁했다. 전시장 두 군데를 돌아보고 지만은 손님 없는 노노카페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다.
“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Regular size에 shot 추가해서 Take out으로 부탁합니다.”
이렇게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지만은 기분이 밝아졌다.
젊은 애들이 다니는 카페에서 같은 주문을 했을 때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 놀라는 눈으로 바라본 이후, 지만은 항상 똑같이 주문하는 습관이 생겼다. 노인들은 믹스커피만 먹는 줄로 아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일침이랄까.
주문을 받은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직원이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그럴 수 도 있겠다 싶어 지만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책임자로 보이는 조금 젊은 여자가 다시 와서 주문을 확인하고도 한참 지나서야 지만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받았다. 손님도 하나 없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받기까지 족히 십분 이상 걸렸지만 지만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살아온 긴 시간에 비하면 그깟 십 분쯤은 터럭만큼도 아닌 것을. 오히려 지만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내가 너무 즐기는 것은 아닐까? 주문을 이해하지 못해 불안하던 직원에게 폐가 된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고 있었다.
‘ 다음에는 노노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그렇게 주문하지 말아야겠다.’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앉을 곳을 물색하는데 창 너머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