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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이 밀려왔다

by rosa



15.




토요일 오후, 첫눈이라도 내리려는지 꾸물거리는 날씨 따라 오른 무릎이 콕콕 쑤신다.

지만은 읽던 책에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끼워 표시하고 책을 접었다. 누가 왔는지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다리를 끌며 일어난 지만은 인터폰 화면에서 둘째 며느리를 확인하고 꾹꾹 버튼을 눌러 주차장으로 연결된 문을 열었다. 이내 현관 도어까지 열고 노루발을 내려놓았다. 며느리는 혼자 지내는 시아버지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며 항상 초인종을 눌렀다. 가끔은 제 스스로 열고 들어와도 될 걸 유난 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유학까지 한 며느리라서 매너가 좋다로 정리한 이후부터는 별로 개의치 않고 있다. 며느리의 방문은 언제나 요란스러운 편이라서 조용한 지만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오늘도 며느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 아버님 저 왔어요.” 하며 콧소리를 냈다.

“ 오냐 추운데 오느라 애썼다. 안 와도 괜찮다니까 괜한 걸음을 하는구나.”

“ 아버님 혼자서 지내시기 어려우실 텐데 제가 도울 거 있음 해드려야죠.~~”

" 괜찮다니까 그런다."


여기까지는 매번 반복되는 둘의 인사이다.

지만은 애초에 깔끔해서 청소며 빨래를 남의 손에 맡기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는 며느리가 가끔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손주 녀석들이나 데리고 오면 또 모를까 홀시아버지가 며느리랑 둘이서 대화하는 것이 지만에게는 썩 편한 시간이 아닌 것을 며느리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매번 같은 인사를 되풀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아버님 부산 형님이 아버님한테 해물볶음 보냈다는데 받으셨어요?”

“ 아직 못 받았는데.”

“ 형님이 아버님 해물볶음 좋아하시나 보다고, 받아서 해 드리라고 그랬는데.”

말끝을 흐리는 며느리의 어투에서 ' 뭔가 궁금하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것을 지만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혼자 살면서 평소에는 두 팩 정도면 충분히 먹는다고 했던 지만이 해물을 여덟 팩이나 보내라 했으니 궁금할 수도 있겠다.

한 번씩 부산에 사는 딸 내외가 올 때면 진공 포장된 해물볶음을 가져오는데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 편리하게 조리할 수 있어서 괜찮다 여긴 것은 사실이다. 식탐 없는 지만이 갑자기 평소보다 네 배나 많이 주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서 아이들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운 시아버지에게 며느리 입장에서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궁금한 채 있을 수밖에.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며느리가 여전히 미스터리 한 눈빛을 지닌 채 청소할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지만은 이렇게 한 바탕 소란을 떨면 답답해짐을 느낀다. 오늘도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에 외투를 걸치고 단장을 짚었다. 빼꼼 현관문을 열려는데 아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지 않았는지 며느리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님 댁에 청소하러 왔는데 힘들어 죽겠어요.”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는 지만. 쓸쓸함이 밀려왔다.


나쁜 짓 안 하고 살아 복을 받았는지 운 좋게 재산이 모였다. 지만은 삼 년 전에 유산 상속을 미리 했다. 오랫동안 살았던 이층 단독 주택은 관리하기도 어렵고 혼자 사는 데 과하다는 생각에 큰 아들네 넘겨주고 아파트 한 채는 팔아서 반은 작은 아들 집 평수 넓히는데 쓰라 주고 반은 딸에게 비자금으로 챙겨주었다. 경매로 사두었던 땅 값이 꽤 올라 여기 작은 아파트 하나 사고도 통장에 넉넉하게 노후자금을 준비해 둘 수 있었다. 혼자 살면서 적어도 나 죽기 전까지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이다 여기며 조용히 살아가는 지만. 그가 들은 며느리 말은 충격이었다.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지만은 밀려오는 분노와 고독을 누르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거울 속 초라한 노인이 쓸쓸하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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