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잘못 봤나?”
지만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한 문장을 말하고는 이내 소리를 죽였다. 연이가 벤치에 혼자 앉아 먼 산을 보고 있는 곁에 검은 개 두 마리가 꼬리 흔들며 앉아 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지만은 잠시 망설이다 카페를 나서 천천히 연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흠, 흠 ”
인기척에 놀란 연이가 벤치 안쪽으로 움찔 움직였다.
“ 어르신 어떻게 여기서 만나요?”
지만은 잠시 미간이 찌푸려 드는 것을 느꼈다. 나이 차이가 좀 나기는 하지만 연이는 항상 지만을 어르신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호식에게는 ‘호식 씨’라고 하며 웃기도 잘하면서 정작 지만에게는 깍듯하게 어르신이라 하며 자른듯한 예의를 갖추는 연이. 그녀 철벽방어에 도무지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 사 여사는 웬일이에요? 근처에 살아요?”
“ 아니에요. 딸이 외손녀랑 그림 보러 간다고 해서 왔어요. 저는 다리가 아파서 여기 앉아 있어요.”
“ 강아지가 잘 생겼네요.”
주변머리 없는 지만이 강아지에게로 눈을 옮기며 허리를 굽히고 강아지 두 마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 외손녀 아이들인데 아주 조용해요.”
“ 그러네요. 훈련이 잘되어 있군요. 귀여운 녀석들이네요.”
젊은 시절 군견을 돌보던 경험 때문인지 지만은 새로운 사람과 섞이는 것보다는 강아지와 있는 것이 편했고, 지금도 갑작스러운 연이와의 만남을 풀어 갈 방편으로 강아지 두 마리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동물 중에 인간의 시선을 가장 잘 읽어내는 녀석이 개인 것을 지만은 알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주시하며 그 사람의 감정과 분위기를 잘 읽는 개는 가장 오랜 시간을 인간과 함께 진화한 친구였고 지만에게는 그 특별함이 더했다.
“ 어르신은 근처에 사시나 봐요?”
“ 조금 걸으면 집이에요, 산책하기 좋아서 종종 오는 곳인데 여기서 사 여사를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 네, 저도 반가워요.”
진심 가득한 두 사람의 인사가 생각해 보니 거의 일 년 만에 나눈 두 사람 처음 대화였다는 사실에 둘 다 적지 아니 놀랐다. 말은 안 했지만 연이도 지만도 서로에게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을 숨기고 그저 예의 바른 척 지내온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은 신중한 둘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일지도. 지만의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가 식어가고 있었지만 혼자서 커피를 홀짝이기가 어색해서 지만은 벤치 아래쪽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 할머니~~~”
낭랑한 목소리로 연이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가씨가 연이의 외손녀인 듯했다. 그 한 걸음 뒤에는 몇 번 본 적 있는 연이 외동딸이 선글라스를 끼고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걸어왔다.
“ 할머니 심심하지 않으셨어요?”
“ 아니 할머니도 친구를 만났거든.”
지만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연이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만은 갑자기 불끈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안면이 있어서인지 딸이 지만에게 까딱 고개로 인사 했다.
“ 네 반가워요. 그림 잘 봤어요?”
“ 작품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래도 눈에 드는 그림 몇 점이랑 도자기를 보고 왔어요.”
“ 엄마 춥지 않아요? 이제 가요.”
강아지들은 손녀에게 목줄이 잡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연이가 천천히 일어나며 지만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떠나가는 연이의 뒷모습을 보며 지만은 아쉬운 한편 이런 우연이 연이와의 거리를 좁혀주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