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간 방학이 시작됐다.
말이 방학이지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노인들을 위해 센터 일부는 운영을 계속해야 했다. 원장도 선생도 노인들을 챙기는 데는 효부 효녀가 울고 갈 정도로 성심을 다했다. 지만과 호식을 비롯한 스무 명 남짓 원생은 방학이라고 해도 따로 계획이 없었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센터에 등원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이는 삼척으로 가족 여행을 간다고 했다. 연이 여행 소식을 들은 지만이 부산에서 보내온 해물볶음을 전해 주었다. 리조트로 여행 간다니 요긴하게 쓸 기회를 잡았다 싶어 전하려는데 난감.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온 물건을 전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접 연이집으로 배송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선물 하나 전하기도 쉽지 않은 늘그막 현실이 씁쓸했다. 할 수 없이 지만이 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역시 원장은 그들의 오작교였다. 지만은 고맙다 했고 연이는 수고를 끼쳐 미안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연이가 없는 연말 센터에 나와있는 지만은 물론 호식도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셋은 어느새 원내에서 삼총사로 불리고 있었다. 너무 다른 세 사람이 삼총사가 된 데는 잠시 일탈을 원장에게 들켜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모든 원생의 등 하원은 교사들의 안내로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집이 가까운 지만과 호식은 운동 삼아 걸어 다니고 있었고 연이는 15분쯤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유로 세사람이 밖에서 따로 만날 일은 없었다.
날이 꾸물거리던 오후 연이는 은행에 볼일이 있었다. 그날은 딸이 연이에게 올 수 없기에 특별히 부탁하여 집 근처 은행 앞에서 통학버스를 내리기로 딸과 상의한 날이었다. 원장은 걱정되었지만 연이가 집을 못 찾아갈 정도의 인지력도 아니고 걷는데 무리가 되는 먼 길도 아니라서 은행 앞에 연이를 내려놓았다. 애써 찜찜한 마음을 달랬다. 연이가 은행 안으로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소파에 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마감이 임박한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자가 많지 않았다. 둘러보느라 돌리고있던 고개를 바르게 했다.
“연이 씨”
싱글싱글 웃고 있는 호식과 어색하게 지팡이 짚고 서있는 지만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원장이 선영과 통화하는 것을 듣고 미리 와서 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연이도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았다. 지난번 미술관에서 지만과의 짧은 만남 이후로 간혹 센터에서도 한 마디씩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호식이 자주 끼어들어 셋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선생님들도 그들을 함께 부를 때는 삼총사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작전 끝에 삼총사로서 첫 만남을 그냥 끝내기는 서운하다며 호식이 밥이라도 먹자고 했다.
“ 도착시간이 늦으면 딸이 걱정을 해서.”
연이는 염려 반 기대 반의 맘을 다잡았다. ‘그래 한 번인데 모.’
호식이 앞장서 들어간 곳은 칼국수가 맛있다는 은행 건너 작은 분식집이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 둘과 엉성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조심조심 식당 안으로 발을 옮겼다.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는지 주인도 손님들도 갑자기 등장한 노인 셋에 수상한 눈길을 꽂았다.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씩씩한 호식이 “ 칼국수 셋 ”이라고 외치듯 주문했다.
“ 키오스크에서 주문하세요”
날벼락이었다. 키오스크라니, 이제 밥 주문조차 모르면 굶어야 하는 세대가 된 것인지. 난처한 호식 대신 지만이 일어섰다. 기계 앞에서 화면을 터치하며 주문을 완료하고 카드로 결제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연이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록 칼국수 한 그릇이었지만 인생 노을녁에 만난 새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연이에게는 한 번도 못했던 일이라서 기쁘고 신났다. 평소 잘 먹지 않던 연이가 얼추 반 그릇이나 비운 걸 보면 어지간히도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밖으로 나서는데 온통 눈 세상이 되었다. 큰일이 났다. 이 눈길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셋은 서로 얼굴만 바라 볼뿐 어찌해야 할지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지만이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이어 바로 울리는 전화기 저편에 놀라는 원장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날의 구세주일뿐더러 든든한 삼총사의 후원자가 된 날이기도 했다.
심심한 센터에서의 오후, 방학이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은 과연 지만과 호식에게만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