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토요일 점심에 다른 약속 없으시면 저랑 하시겠어요?"
지만은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연이 생일 파티에 정식으로 초대받았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거구나.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하고 토요일이 언제 올지 손꼽는 스스로를 보며 점잖지 못하게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연이가 한 시간 거리 딸 집으로 움직여야 하니 아들에게 외출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늙은 아비가 친구 만나는데 뭔 자식 허락이 필요할까 싶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재차 확인하는 바람에 인사차 들른 아들에게 ‘친구 집에 초대받아서 점심 먹고 올 거’라고 했다.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며느리는 큰 눈이 더 커지며 놀라워했다.
“ 아버님 사 여사님 생일 초대받으셨어요?”
“ 그렇게 됐다.”
“ 어머 아버님 좋으시겠어요, 데이트하시는 거네요. 멋지게 하고 가세요. 참 선물은 준비하셨어요?”
시아버지 데이트를 반기는 건지 주책이라고 비웃는 건지 그놈의 콧소리는 영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며느리 반응을 살피기에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 더 컸다. 여자 친구에게 받는 생일초대는 처음이라서 어찌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지만. 하얀 사각봉투에 '생일을 축하합니다, 사여사'라고 적었다. 달필소리를 듣던 지만이었지만 나이는 피해 가지 못하는지 세로줄이 삐딱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새 봉투를 꺼내서 가로로 다시 적었다. 세로글보다는 정돈이 되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사여사라는 글자에 자꾸 아쉬운 눈이 머물렀다. 세 번째 봉투를 꺼냈다. '생일축하합니다, 연이 씨.' 이제야 만족한 지만이 슈트 안쪽주머니에 사랑스러운 금일봉을 챙겼다.
늦은 밤 찾아온 수지는 고급지게 포장한 화장품 세트와 꽃바구니를 기어코 지만의 손에 들렸다. 과한 관심, 어색한 선물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연이 씨가 불편해하진 않으려나' 지만은 숙제 같은 고민으로 밤새 끙끙거렸다.
토요일 아침 지만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연이가 둘째 아들과 함께 도착했다.
선수는 아버지를 닮았을 거란 생각이 지만의 첫 느낌이었다. 큰 키에 마르고 지나치게 단정해 보이는, 젊은 시절 지만의 모습이 언듯 스쳤다. 승용차 뒷자리 연이에 이어 지만이 올랐다. 처음 연이를 만났던 그날처럼 핑크색 카디건을 챙겨 입은 연이에게서 지만은 똑같은 설렘을 느꼈다.
가는 길에 기운을 좀 회복한 호식을 조수석에 태웠다. 봄이라기에는 아직 찬 느낌이지만 노인들 마음은 봄 소풍 가는 유치원생 마냥 즐거웠다.
"연이 씨 날로 예뻐지면 형님이 불안해요. 안 그래도 센터에서 배 아파 죽는 노인네 여럿 있던데. "
"싱거운 사람 또 뭔 소리를 하려고 "
"형님도 아시잖아요. 김 회장이 연이 씨보고 첫눈에 반했던 거. 그 형님 연이 씨랑 형님이랑 커플이냐고 저한테 묻는데 배 아파하는 게 틀림없어요. 하하하."
호식이 웃음에 따라 웃기는 하지만 노인회장을 지낸 김 씨를 생각하면 지만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제일 연장자라서 형님으로 예우는 하지만 연이에 대해 뒷말 만든 것을 알고 지만이 따로 불러 일침을 가한 것을 연이도 호식도 모른다.
연이에게 진심인 지만은 오늘을 놓치기 싫었다.
웃음 지나간 승용차 뒷자리, 심호흡한 지만이 용기 내어 연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선수를 의식하는 듯 연이가 손을 움츠렸지만 지만이 힘주어 손을 당겼다.
“ 연이 씨, 우리 이 손 놓지 말고 마지막 날까지 의지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지만의 느닷없는 프러포즈에 살짝 당황했지만 연이도 싫지 않아보였다. 미소로 답하는 연이가 지만에게 한없이 예뻐 보였다. 지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봄볕이 따사로운 정오 무렵 그들은 선영의 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