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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Jun 10. 2024

영원한 친구

32.     



                

  봄이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나갔다. 

  벚꽃이 비처럼 내리던 이틀,  사흘 만에 여름이 급한 걸음으로 왔다.

  호식이 간암말기라는 것을 지만도 연이도 그즈음에 알았다. 외견상 간이 고장 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가졌지만 병명을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었다.  

    

  젊은 시절, 버둥거리며 살아보려 애썼지만 언제나 빈 수레였던 재수 없는 인생에 화풀이하듯 부어댄 술이 간을 망치는 동안 가족이 해체되었다. 마누라가 맨 처음 도망갔고 큰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떠났다. 둘째 아들과 딸까지 모두 떠났을 때 호식은 삶의 끝을 보았다. 미련 없는 세상에 인사한 줄 남기지 않고 소주 한 병을 대접에 부어 수면제 스물여덟 알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모처럼 기분 좋은 나른한 오후였다.    

  

  상냥한 눈부심에 눈이 떠졌다.

  죽음의 인도자대신 여동생이 붉은 눈을 한 채 내려다보는 눈동자에서 초췌한 자신의 눈부처를 발견하고 호식은 기억하는 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 자신조차 아끼지 못하는데 누굴 사랑했었을까. 호식의 오열이 멈출 때까지 피붙이의 실낱같은 정으로 여동생이 따라 울었다. 죽으려 했던 그날 자신의 몸에 암덩어리가 악다구니 치며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사는 이유가 됐다. 술을 끊고 절제된 생활과 약물치료로 호식이 사람꼴을 갖춰갔다. 못 알아볼 만큼 장성한 자식들이 얼굴을 비쳤다. 정, 사랑 그런 감정은 사치였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긴 세월을 용서하고 뒤늦게 호식은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악마가 베푼 잠깐의 선물이었다.     

       

  호식은 ‘이만하면 됐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더 이상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껄껄 웃는 호식에게 유머는 누추한 자신을  싸매는 포장지였다. 연이가 쉽게 센터에 적응한 것도 지만과의 황혼 로맨스를 가진 것도 모두 호식 덕분임을 잊지 않았다.    

 

  그런 호식을 더 이상 센터에서 볼 수 없었다.

  보이던 이가 안 보이면 대개 입원을 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을 센터에 모든 노인들은 알고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호식의 빈자리는 모두에게 커다란 싱크 홀이었다.      


  연이가 원장에게 호식의 병문안을 요청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인생 갈무리하는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동병상련. 원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영에게 동의를 구하는 전화를 끊고 지만과 셋이 호식을 보러 가는 길. 호식의 유머로 차 안이 떠들썩했던 그 겨울 잔상이 더는 남아있지 않은 승합차에서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듬성듬성 있던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고 노랑이 삭아 검어진 얼굴이 낯설었다. 푹 꺼진 눈과 대비하여 불러온 배는 터지기 직전으로 위태해 보였다. 간간히 헛소리를 해도 아직 의식이 돌아올 때도 있다. 여동생과 원장이 자리를 피해주어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 호식은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개차반처럼 살아온 삶이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친구들 배웅받아 기쁘다고 산소마스크를 쓴 호식이 힘겹게 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이것이 마지막임을 모두 아는 슬픈 순간. 지만과 연이 그리고 호식 세 친구는 세월 묻어 거친 손을 서로 얽히게 잡고 애써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슴으로 찰칵 각자 의미 있는 한컷을 소중히 담았다.

         



  호식의 마지막은 누이동생을 비롯한 가족이 다섯, 지만과 연이 그리고 원장 그렇게 친구 셋이 참석한 단출한 장례였다. 빈소도 없이  안치실에서 하룻밤 지내고  아직 새벽이라기도 미안하게  하늘조차 깨지 못한 시간에 발인했다.  

첫 번째 화로 문이 열리고 호식이 마지막 춤추듯 스르르  빨려 들어간 후 불꽃이 일었다. 모니터에 '호식'이 화장 중이라는 글자가 반짝반짝했다.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두 시간 내내 연이 입안에 노래 한 소절이 굴러다녔다.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따뜻한 단지에 담긴 호식이 실없는 농담을 지껄일 것 같았다. 살아서 없던 복을 죽어서 받았는지  정받은 자리에는 오전 햇빛이 가득했다. 창 너머 녹음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을 차지한 것에 축하한다 말해도 되는지 몰랐다.

  

  원장은 작은 액자를 골라 호식이 지만, 연이와 함께 웃고 있는 삼총사 사진을 담았다. 유골함 옆, 아직 명패도 없는 썰렁한 공간을 채우듯이 액자를 세웠다. 지난겨울 폭설 때문에 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던 그날 찍은 사진이 이렇게 쓰일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곡소리 하나 없이 국화 한 송이 없이 호식의 장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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