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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Jun 13. 2024

노을빛 사랑

35.        



             

  늦은 저녁, 시어 빠진 김치쪼가리에 소주잔을 앞에 둔 선수도 착잡한 심경이었다.

  엄마를 그렇게 버리듯 두고 돌아온 것이 맘에 걸렸다. 살가이 표현 못 해도 가족 일이라면, 특히 엄마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오는 누나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이렇게 까지 틈이 생겼는지 알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발단이 되었던 그날 엄마 생일에 과연 '내가 막내 동생처럼 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했을까?'라는 생각에 맘이 묶였다. 비로소 누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동시에 매번 패배하는 자기 인생이 짜증 나게 서글퍼졌다. 괴로운 소주병이 식탁 위에 또 한 병 누웠다.  

        

  19층 아파트, 미세먼지 가득한 새벽하늘이 우중충했다. 베란다에 가득 찬 식물들이 연이가 집을 비운 사이 말라죽었다. 자식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거름처럼 토해내며 애지중지 키운 녀석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유도 모르며 말라간 녀석들이 연이를 용서할까 생각하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 선영을 떠올렸다. '딸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어쩌면 나만을 위한 욕심이 아닐까'  곰곰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여자를 포기하고 엄마를 선택한 선영을 만류하지 않은 연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엄마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내몬 사람이 어쩌면 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 속에 든 말 한마디 내지 않고 자식에게 올인한 선영이 지금 연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누구보다 연이가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슴이 답답했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화면에 표시되며 울렸다. 스팸이거니 무시했는데 두 번이나 연속으로 울리는 전화를 세 번째에 받았다.     

      

   “ 어르신 요양보호사예요. 따님이 신청하셔서 오늘부터 가요. 현관 번호는 받았으니까 제가 열고 들어갈게요. 놀라지 마세요.”     


  선영 내색 없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엄마를 챙겼다. 센터에 나가지 않는 기간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 부딪힌 상황을 통해 또 알게 되었다. 연이 늘그막 모든 사치가 딸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불편하게 대치하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할지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싫었다.


  선영과 동년배로 보이는 보호사 선생은 연이의 목욕부터 음식과 빨래 청소까지 정성을 다해 도왔다.  도움 받는 것이 자꾸 익숙해졌다. 안 그러고 싶은데 마음과는 별개로 몸이 적응하는 구차한 현실.  

선생이 자분자분 말벗도 돼주고 가벼이 산책하며 기분 전환하는 시간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연이 몸도 마음도 겨울에서 벗어난 듯했다. 이주일이 지났다.

    

우악스럽던 여름도 기운을 덜었다.

선재 가족이 돌아오고 걸을 만큼 회복한 연이는 다시 센터로 등원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 년 같은 한 달이었다.    

  



   “연이 씨”     


  그녀 없는 동안의 갈증을 풀듯 지만은 누가 보든 개의치 않고 연이를 부둥켜안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더딘 줄 몰랐다. 이제 매일 연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지만에게 용기를 주었다. 둘의 재회를 질투하듯 효심이 바라보고 있었다. 연이가 없던 내내 연이의 워커를 밀고 다녔던 효심. 샐쭉하여 입술을 내밀었다.  연이는 오랜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처럼 포근한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  다정한 눈이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지만은 더 이상 연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든 연이와 남은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매일 커졌다. 늙었다 해도 지만은 연이를 책임질 자신이 충만했다. 군인연금이 나오고 통장 잔고도 부족함 없다. 연이만 허락하면 언제든지 둘이서 즈런즈런 살 수 있는데 자식들이 문제였다. 지만의 자식들은 어찌 설득하면 이해받을 수 있을 테지만 선영이 가장 걸림돌이었다. 생각해 보면 생일파티 이전까지만 해도 선영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미술관에서도 가끔 센터에서 만나도 인사성이 바른 아이였다. 엄마에 대한 보살핌도 극진한 딸이었는데. 오해가 부른 참담한 결과를 어찌 풀어야 할까 지만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찐사랑주간보호센터에서 지만과 연이는 공식커플로 인정받는 사이가 됐다. 새로 입소하는 남자노인이 물색없이 연이에게 추파를 던지면 주변에서 더 난리 치며 지만을 내세워줬다. 나이에 비해 핸섬한 지만을 마음에 둔 여인이 지만 곁에서 얼쩡대다가 오지랖 효심에게 공격당하기도 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아직 푸른 이들, 소란한 일상이 때로 얼굴을 붉게 만들어도 내일보다 오늘이 소중한 노인들에게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렇게 하루 더 익어갈 뿐.


그동안 가을이 성큼 오고 황혼 커플은 단풍 같은 노을빛 사랑을 천천히 그리고 곱게 물들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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