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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a Jun 12. 2024

너테

34.          



          

  수술 후 일주일 만에 연이는 딸 집으로 퇴원했다. 허리에 보호대를 하고 워커를 잡으면 실내 생활은 그럭저럭 할만했다. 딸은 근무와 간병을 같이 하느라 부쩍 수척한 얼굴이었다. 원래 다정한 아이가  아니라서 애초부터 살가운 모녀의 정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저 휴전의 선을 넘지 않는 지점에 연이도 선영도 고드름처럼 매달려있었다.

한 달을 예정했지만 연이는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에 탈출하고 싶었다.


  선영은 일찍 엄마 잠자리를 준비하며 밤사이 소요 될 만한 여러 것들을 함께 챙겼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 물병에 찬물, 머그컵, 유리컵, 휴지, 간식, 리모컨. 성경. 화장실을 제외한 연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은 거의 손 닿는 곳에 두었다.

보름 넘게 엄마에 집중한 탓인지 선영은 번아웃 직전이었다. 오랜만에 쓰리 오프, 이미 오프하나는 퇴근과 함께 날아갔다. 이트킾 간호사의 숙명이랄까. 오전에 잠깐 자고 깨어나 밀린 집안일을 프로젝트 진행하듯 해치웠다. 선영  몸이  깊은 잠을 원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다음날 오프하나가 남아 있다는 것에 위안 삼았다. 필요시 약으로 처방받은 졸피드 반쪽을 더 먹었다. 그렇게 선영은 오랜만에 달콤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지만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이 탓이겠지만 보청기가 오래된 때문이기도 했다. 새로 바꿀까 생각도 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굳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연이 목소리는 잘 들린다는 것. 그래서 지만은 연이와의 통화가 즐거웠다. 마치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에는 이십 년쯤 회춘한 기분이랄까 엔도르핀이 퐁퐁 솟았다.      


  수술 후 연이가 딸 집에 머물러서 못 만난 지도 보름이 훌쩍 지났다. 수술 후 한 달은 센터에 나오지 못할 거라 했는데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유일한 희망은 시간 정하고 하는 전화통화뿐.  온종일 지만은 시계에 집중하는 나날이었다.   


   “사 여사 오늘은 어때요, 잘 지냈어요?”     

     

  지만은 아직 ‘연이 씨’라는 호칭을 쓸 수 없다. 연이가 완강했기에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지만 내심 지만은 호칭을 바꾸는 날이 두 사람 장미 빛 새날이 시작되는 날일 거라 믿고 뚝심 있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연이는 잠들었지만 소리에 예민한 딸이 깰까 봐 소리를 낮추어 조용조용 대답했다.

  지만은 평소와 다른 연이의 발성에 귀 기울였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 잘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지요?”      


  조바심 나는 연이 마음도 모르고 지만은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 딸이 자고 있다고요. 전화 나중에 하자고요 어르신.”  

        

  작게 소리를 조절한다는 것이 오히려 큰 소리를 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 앞에 딸이 서있다. 낭패였다.       

   

   “ 그렇게 좋아요? 아예 같이 지 그래요.”     


  냉소하는 선영의 말을 들으며 연이도 분통이 터졌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 정도 소리에 잠을 깨서 비비 꼬며 대들 일인지, 내 딸이지만 그 예민함에 오만 정이 떨어졌다.    

      

   “ 질투하니?”     


  완벽한 실수였다. 서른 살부터 혼자 살아온 딸에 대한 금기어를 제 입으로 말하다니. 연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란 것을 알았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다.   

       

   “ 미쳤군요, 남자에게 미치면 그렇게 돼요?”     


  두 여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급소만 골라 공격하는 모양이 짐승이었다. 선영이 제 방으로 들어가서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연이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보름이란 시간을 더 딸과 지낼 자신이 없었다. 그 속에는 건들지 말아야 할 딸의 상처를 제 손으로 후벼 팠다는 후회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연이도 한계를 느꼈다.

     

  퇴근하던 선수가 와서 연이를 엄마 집으로 모셔갔다.

  선영은 너무도 달라진 연이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그만 포기해 버렸다. 

  어쩌면 선영이 먼저  둘의 사이를 응원할 수도 있었다. 둘이 사귀느냐고 처음 물었을 때 '그렇다' 대답을 들었다면 선영이 이럴 이유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은 나쁜 이라고 가르친 엄마가 선영을 속였다.  


선영 이혼의 결정적 이유도 남편 불륜 자체가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고 반성 없는 태도가 원인이었다. 그렇게 짧은 결혼 생활이 끝나고 선영은 남자라는 종족을 몽땅 혐오하는  화석 같은 여자가 되어버렸다.  질투하냐는 엄마의 질문이 선영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이 너테가 되어 모녀 관계까지 망쳐버렸다.     


  선수가  운전하는 차에서 연이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딸과 싸우고 쫓겨나는 패잔병, 남자에 환장해서 딸을 상처 낸 환향 년의 이미지가 겹쳐서 연이를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연애다운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이 서러웠다. ‘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연이는 밤길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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