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돈과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쓴다.
친부의 회사 파산이 문지방을 덮치기 전, 코찔찔이 초등학생의 나는 미술, 축구, 농구, 자전거, 영화를 좋아했다. 미술은 제법 재능이 있어서 상도 많이 탔다. 학원을 다니며 데생까지 배웠다. 생각보다 공부머리가 있어서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과학고등학교를 준비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깊숙한 어딘가에 예술의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지만, 철학과 사람의 감정 그리고 영화와 음악에 대해 말할 때도 더러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창작으로, 서른이 되어 거의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도 이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글 쓰는 게 어렵지 않다. 누구에게 배워본 적도 없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이것은 이제 나만의 스포츠가 되었고, 돈과 크게 관련 없이도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글을 잡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은 살면서 미친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거지 행색을 하고 아무도 없는 공중에 무어라 중얼거리며 거리를 표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가끔 저 사람들이 저기까지 도달한 여정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가서 물어보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해 보았을 때, 고통도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레드'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어
나는 가난에 의한 비인간적인 수탈, 치욕, 폭력을 겪어보았다. 일터 동료의 사고로 인한 죽음을 겪어보았다. 내가 일하다 죽을뻔하기도 해 봤다. 친부와는 절연을 하였다. 여자들과는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많이 헤어졌다.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다.(무당들은 나에게 결혼을 늦게 하라고 한다. 한 풀 꺾여야 한댄다.)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고통은 가족의 병환, 사고, 죽음이 있다. 범죄에 의한 치명적 피해 정도가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해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을 보통 사람들보다는 다양하게 겪어본 편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고통을 정면으로 뚫어가며, 할 일을 잘해나가고 있다.
만약,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고통들을 당면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해본다.
'알베르 카뮈'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지적인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실존에 있어서 고민하다 보면, 결국 이르는 결말이 자살이라고 했다. 딱히 살아야 할 명확한 사유가 없기 때문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인도 자살을 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이유는 딱히 자살할 이유조차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저 살아서 이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일종의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가 무의미한 돌 굴려 올리기를 하며, 자신은 행복하다고 믿는 것처럼.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을 따로 떼어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족, 애인, 사랑 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삶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내용을 처음 봤을 적엔, 도통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글을 쓰다보니, 달리 다가 온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가족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여겨보자.
나는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 삶의 근본이다. 스토아 철학은 공동체를 위한 미덕을 실천할 것을 권장한다. 그것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지금 시대에서는 가족, 벗 등의 공동체를 위해 성실하고 선량하게 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공동체 구성원이 다 사라진다면, 거기서부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마도 나조차 반 이상은 붕괴할 것이다. 정신과 영혼이 가장 먼저 붕괴할 것이고, 육체가 뒤를 이을 것 같다. 시간이 좀 흐르고, 스스로의 노력이 가미되면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스스로를 그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저 정도의 고통에서는 지금과 같은 최고 효율의 퍼포먼스를 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한계라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의 한계를 만나면, 미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한계를 뛰어넘는 크기의 고통이 닥쳤을 때. 그래서 사람이 미친 사람이 되었을 때, 크게 두 가지 형태를 띠는 것 같다. 하나는 말 그대로 공중에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는 미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한없이 즐거워 보이는 미친 사람이다.
광기, 스산함, 쾌락, 성적 욕구 행각, 음주가무 등 따위는 한계를 넘어선 고통을 물리적으로 발현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된다. 가장 즐겁고 창의적이어 보이는 사람은 한계를 넘어선 고통을 겪고 있다는 모순적인 설명이 된다.
모순적이지만, 꽤 납득이 된다. 관찰이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사회인이라면 다들 저런 세상 모습 한 번씩은 보았을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자면, 항상 험상궂은 표정에 말수가 없고 스트레스에 시달려 동태눈깔을 한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한계가 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도 꽤 버티고 있다는 뜻이며, 그래도 버텨낼 만하다는 뜻이다.
아직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사는 게 괴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쓴 오늘의 글을 기억해 보면 좋을 것이다. 좋다는 것은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 가족들에게 사고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오늘 내 벗들에게 사고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오늘 나에게 사고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내 공동체가 아직 세상에 남아있다는 그 사실이 변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올 고통보다는 지금의 고통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감사할 수 있다. 저런 일들이 안 벌어진다는 보장은 없고, 벌어졌을 때 우리가 미친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런 과정으로 생각하다 보면, 손품에 쥐고 있는 당연한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
다만 그걸로 감사는 하되, 만족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늘 말하지만 우리는 별을 겨냥해야 한다. 하수구가 아니라.
살다 보면 다른 날보다 유달리 괴로운 날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내용을 읽으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긍정 운운해대는 광대들이 있다면, 이 글을 보여주고 궁둥짝을 한 대 걷어 차주길 바란다.
멍충이들.
영화 '마더' ost
https://www.youtube.com/watch?v=HMZvrdZ86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