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돈데보이>

a시가 아니면 어디로 가나

by 박순영

은향은 통장잔고를 확인하고 시름에 빠진다. 이걸로는 석달도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형기와의 잘못된 연애탓에 돈 2000만이 훌쩍 날라간 것도 한몫했고 게다가 1년 넘게 수입이 없다는것도 문제였다.

형기는 집을 옮긴다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고 그걸로 둘은 갈등을 빚다가 마침내 은향이 비상금 2000을 인출해 넘기고나서 딱 일주일만에 헤어졌다. 형기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걸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그렇게도 그녀는 눈과귀를 다 막고 그 연애에 몰두한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20대 후반부터는 도통 주위에 자기좋다는 남자를 찾기 어려웠고 이제 서른보다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여선지 어쩌다 소개라도 들어올라치면 이른바 ‘돌싱’이 대부분인 그런 상황이다. 요즘 나이든 싱글도 많다는데 그런 남자는 은향에게 걸리지 않고 있다..


은향은 딱히 결혼해야한다는 강박은 없어도 지난번 형기와의 거의 다 됐던 연애가 깨진 뒤엔 오기에서 비롯됐는지 꼭 결혼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신이 우습고 못났다 생각도 했지만 마음의 향방은 의지와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돈으로 어떻게 버티나...이럴 때 집이라도 나가주면...하고 그녀는 오랜시간 바랐지만 안그래도 거래절벽인 요즘, 어쩌다보니 최고가가 돼버린 자기 집을 문의하는 이는 전혀 없는듯했다.. 동네 부동산 몇곳엔 서너번씩 전화를 해서, 1000, 2000씩 다운까지 했지만 그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렇게 계속 간다면 그 무섭다는 카드론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 고정소득이 있지도 않은 형편에 비싼 이자와 원금 상환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게 봄이 되면서 은향은 조금씩 위축되고 병들고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이럴 때 형기라도 돌아와준다면, 하고 은근 기대도 했고, 전해 들은바로는 따로 만나던 그녀와도 헤어졌다는데도 그는 은향에게 일말의 언질도 없다..

이별이야 그렇다쳐도, 가져간 돈은 돌려줘야 하는게 아닌가,하고 두어번 그에게 돈 이야기를 꺼냈다, 갚는다 갚어! 하고 소리치는 그를 대하며, 그녀는 이루 말할수 없는 배반과 모멸감에 빠져 돈을 단념하는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 컴퓨터 책상 아래 거뭇한게 눈에 들어온다. 유난히 물걸레질을 싫어하는 은향인지라 진공청소기만 가끔 돌릴뿐, 물걸레를 쓰지 않아 그동안 찌든때, 특히 물건 밑이라든가, 사각지대는 그렇게 얼룩같은게 드문드문 생겨났다.

저거나 치우자, 하고는 세정제를 찾아 바닥에 분사하고 솔로 박박 문지르니 어느정도 지워진다. 되는구나, 궁하면 통한다더니...하면서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내가 웃는다. 형기와 헤어진 뒤 얼마만인가,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와 헤어진 뒤 그래도 용케 버텨왔음에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분사한 세정재를 닦느라 마른걸레를 찾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부동산중개업소란다.

원래 집이라는게 나갈 때 되면 금방 나가, 라고 진숙이 전화로 같이 좋아해준다. 진숙은 신도시 h에 30평을 얼마전에 분양받아 나름 럭셔리한 독신생활을 하는 여고 동창이다. 형기가 있었다면 그와 함께 이사갈 집을 찾아나설텐데, 하며 은향은 문득 그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진숙에게 청을 넣는다. 야, 운짱좀 해주라..

그렇게 해서 은향은 진숙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해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로 한다. 너, a시에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진숙이 거리 이정표에서 a시 표식을 보며 묻는다.


a시....형기와 결혼하면 그곳에서 살기로 했던 곳. 진숙에게는 차마 형기의 일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와 연애 초반에 잠깐 언급한것만으로도 , 당장 끊어 그런 이기적인 놈, 이란 말을 들은터라 은향은 이후 반복된 그와의 결별, 재결합을 일일이 진숙에게 털어놓을 형편이 아니었고 진숙은 초반에 둘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a시가 좋아. 특히 젊은 여자들이 살기 좋아...라고 형기는 자주 언급했다. 형기는 회사가 y시로 이전하는 바람에 오래 살던 a시를 떠나게 되었지만, 머지않아 꼭 다시 a시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a시는 이제는 좀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신도시 특유의 잘 정비된 구획과 근린시설, 의료체계가 잘 돼있어 서울에 집을 잡지 못한 젊은 층이 제일 선호하는 도시중 하나다. 그리고 도시 가운데로 제법 큰 강도 흐르고 그 주변을 따라 갖가지 시설이 들어서 주말이면 서울에서 찾는 인구도 적지 않은 그런 곳이다.

그런 a시 이야기를 형기는 자주 하며, 언젠가 슬쩍, 나랑 살려면 a시로 옮겨,라고 했다. 아마도 둘이 처음 밤을 같이 보낸 직후였던 걸로 은향은 기억한다. 그렇게 말하는 형기의 입에서 살짝 단내가 났지만 그 향까지 은향은 사랑하고 기억하려 했다. 거의 10년만에 찾아온 사랑이라는, 연애라는 그 감정이 너무나 소중해 은향은 어떻게든 결혼으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리고 그게 충분히 가능해보이기도 했다.

은향이 고인이 된 노모로부터 받은 지금 아파트는 20평이 좀 안되는 소형이다. 그래도 시내에서 차로 30분 이내 거리고 지하철이 멀지 않아 나름 역세권이라는 이름을 얹고 있다. 이집을 팔면 형기가 그리도 원하는 a시에 30평대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그와의 관계가 깊어질 즈음 은향은 집을 내놓은 것이다. 아파트보다 저렴한 오피스텔이라면 40평대도 가능하리라 생각하며, 방 네 개짜리 오피스텔을 수도없이 검색했던 은향이다. 하나는 침실, 하나는 옷방, 그리고 남은 둘은 각자 서재로 쓰면 되겠다는 생각 역시 수없이 했다.

그러나 그즈음 미국 금리가 폭등하면서 전세계가 몸살을 앓기 시작 했고 한국은 유독 부동산 분야가 치명타를 맞았다. 그덕에 거래라고는 1,2억을 포기한 급매물 외엔 전혀 없다시피했고 이따금 연립이나 저렴한 빌라의 전,월세 거래가 전부라고 부동산업자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은향이 값을 내리려고 하면, 그정도로는 택도 없다며, 최소 5000에서 1억정도는 다운시켜야 그나마 입질이 올수 있다는 말에 은향은 이러다 a시로 못 가는게 아닌가 했다..

그리 되면, 형기와는 왠지 영영 같이 살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어 슬픔이 밀려왔다. 형기는 근 10년 병치레를 하다 떠난 부친의 뒷바라지에 월급에 대출에 이미 빚이 잔뜩인지라 따로 은향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은향은 오롯이 자기 힘만으로 a시에 집을 마련해야 했고 또 그러고 싶었다. 형기는 몸만 들어오면 되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형기가 떠났다..


그 사실을 모르는 진숙은 은향의 의향도 묻지 않고 이미 a시로 진입중이다.. 복잡하고 마구잡이식으로 설계된 서울과는 판이한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a시의 모습에 진숙은 감탄한다. 언제와도 여긴 쾌적해 그지? 하고는 옆자리 은향의 반응을 살핀다. 은향은 응, 마지못해 답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언젠가 형기 차로 함께 지나치던 눈에 익은 건물과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가는게 은향은 안타깝다. 좀 천천히 갈래? 진숙에게 이야기하자, 진숙은 감속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숙의 차는 a시 중심부로 들어서고, 그곳에 강변을 따라 지은지 15년 안팎의 나름 신축 오핖스텔들이 줄지어 서있다. 저앞에 세울래? 은향의 요구에 진숙은, 너 오피스텔 하려구? 관리비 만만찮을텐데?라고 걱정하면서도 오피스텔 촌 t부동산 앞에 차를 세운다.

향이 북서향인게 마음에 걸리지만 고층이라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권이 예술이라며 부동산 업자는 어떻게든 이 물건을 팔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창 너머 강에선 어제 내린 비탓인지 물안개가 아스라히 피어오르고 있다. 진숙이 오피스텔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은향은 강만 바라본다. 형기가 있었다면 분명 이집을 선택할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갑자기 뜨거운 무엇이 가슴 언저리를 덥혀오는걸 느낀다..그리고는 문득 그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곳 외에 서너군데 오피스텔이며 아파트를 더 본 뒤 은향은 연락주겠다고 업자에게 말하고 진숙의 차에 오른다. 진숙은 여기 칼국수 맛있게 하는 집을 안다며 거기서 저녁을 해결하자고 한다. 안그래도 자기 때문에 먼길을 와서 오후 내내 시간을 내어준 진숙이 고마워 은향은 저녁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숙과 은향은 예의 그 칼국숫집 w에 들어선다. 식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내부는 손님으로 가득해 처음엔 빈자리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은향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진숙이 그녀를 잡으며, 저기 구석에 있다,라고 소리쳤다.

둘은 그 구석에 나있는 두자리에 끼어 앉듯 마주 앉아 단일메뉴인 칼국수 2인분을 주문한다.

웬만하면 아파트로 해,라고 진숙이 컵에 쿨을 따르며 말한다. 오피스텔은 재산가치가 없어, 그리고 요즘 경기가....그러나 은향의 귀엔 진숙의 말대신 강이 흐르며 내는 소리만 들린다. 들리는것 같다. 형기와 함께 살려고 했던 a시에 덩그러니 혼자 살 집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린다.

은향아! 진숙이 놀라서 묻는다.


이집도 이제 한달 후면 비워줘야 한다는 생각에 은향은 마음이 바빠진다. a시에 적당한 매물이 많건만, 형기가 마음에 걸려 그녀는 선뜻 결정을 못한다. 그렇게 열흘이 흐른 것이다. 형기에게 이사 이야기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러는 자신이 엉뚱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누가 헤어진 여자의 이사여부를 알고싶어할까...그러면서도 자기 연락을 형기가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그녀는 최종 결심을 한다. 가서 기다리자 그를.



다음날 은향은 처음 봤던 그 오피스텔로 정하고 t부동산을 나오다 자기가 점심을 걸렀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진숙과 함께 갔던 그 칼국숫집이 떠오른다. 문득, 쫄쫄하고 담백했던 그집 면발이 그리워져 그녀는 마침 다가오는 빈택시 한 대를 세운다. 그리고는 그집 이야기를 하자 기사는 단박에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차를 몬다.


“니가 어떻게 여길?” 하고 은향 이상으로 놀란 형기가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여기서 형기와 마주칠줄은 꿈에도 생각못한 은향은 방금 넘긴 면발이 사례들리면서 켁켁대며 물을 들이킨다. 그사이 형기는 그녀앞에 마주앉는다. 이곳에 외근을 나왔다 출출해서 들어와 봤다고 그는 말한다. 합석, 해도 되는건가 우리? 하고 그가 되묻는다. 은향은 대답대신 애써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한 20여분, 몇 달만에 형기와 마주해 같이 국수를 먹은 그 시간이 은향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돈을 돌려달라고 예전에 두어번 말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던 그가 먼저, 니 돈 갚아야 하는데,라며 미안해하던 것까지 떠오른다. 그러면서, 새사람은 만났구? 라며 그녀의 눈치까지 살폈다. 형기씨는 ? 하고 물었을 때, 야, 여자두 돈이 있어야 붙지,라며 씩 웃던 그의 눈익은 얼굴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런걸 운명이라고 하는건가,라고 은향은 자문하며 침대에 든다. 이 침대에서 형기가 처음 자기를 안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베갯잎에 코를 대본다. 그동안 여러번 세탁했지만 아직도 형기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날밤 그녀는 그 오피스텔에서 그와 함께 사는 꿈을 꾼거 같다.



계약금을 떼이면서까지 그 오피스텔계약을 해지하려는 이유를 부동산업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조건좋고 조망권 좋은 집을 왜...라며 업자는 안타까워한다.

사정이 생겨서요..라며 은향은 부동산을 나온다.


안형기...그와의 재회는 감미로웠다. 그건 처음 그를 만났을때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배신하지 않았는가. 다른 여자의 존재라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게다가 자신에게 돈 2000의 피해까지 입히고 나몰라라 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같이 살게 되면, 그걸 빌미로 그 돈을 갚지 않을게 뻔했다. 돈 이상으로 왜 그만 일방적으로 편리한 관계란 말인가, 하는게 문제다. 결국 은향은 이제 남은건 자기 안의 형기를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계약금 3500을 날리는걸로 갈무리 하기로 했다.


살아서 다신 a시 근처는 얼씬도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미터요금의 두배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택시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차는 잘 구획된 a시를 가로질러 머잖아 서울로 진입하리라. a시가 아니면 어디로 가나, 그런 생각을 하다 그녀는 깜빡 잠이 들고 , 다왔어요 아가씨,라는 기사의 말에 눈을 뜬다. 좀있음 비워줘야 하는 자기 집앞에 택시는 이미 정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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