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날의 선물
습도가 높아선지 몸이 무겁고 무기력해진다. 오늘 비올 확률 60%라더니 오긴 오려나보다...
유럽여행갔을때 베니스와 베른에서 폭우를 만난 기억이 있다. 바깥 빗소리 들으면서 먹었던 베니스의 현지식이었던 파스타는 아무맛도 안 났다. 심심한가 하면 것도 아니고 그저 맹탕 그 자체였다. 물론 한국의 외래 음식들이 우리 입맛에 맞게 '한국화'되었다는건 알지만 그래도 해도 너무했던 케이스. 그래서 난 계속 salt salt!를 외쳤지만 누구도 소금을 가져다 주진 않았다 인심한번 드럽군....
하고 그 다음엔 스위스에서 폭우를 만나 호텔방에 거의 갇히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잠시 비가 줄어들어 잠시 기어나왔다가 다시 굵어진 빗줄기에 흠뻦 젖고 쏜갈같이 안으로 줄행랑을 친기억이 있다. 그러니 무슨 구경을 했겠는가...뒤늦게 호수를 잠깐 본거 외엔.
이렇게 길떠나면 고생인데 거기에 궂은 날씨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겹쳐지면 정말 두고온 '내집'만 생각난다.
떠나봐야 내공간의 소중함을 알듯이, 누군가 내곁을 떠나야 비로소 그의 가치를 새삼 확인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우린 스스럼없이, 거들먹거리며 내곁을 지켜주던 많은이들을 떠나가게 한다.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 머무른 공간, 그들의 말들, 조언들, 이 모든것이 뒤늦게 그리움의 파도로 나를 덮쳐온다.
비가 오면 안그래도 유리 신경인 내 멘탈이 한없이 약해지고 예민해진다. 이른바 '우울모드'에 제대로 진입하는것이다. 몸이 찌뿌둥한거야 그렇다쳐도 마음까지 축 늘어져 아무 의욕도 용기도 나지않는다. 이런날은 종일 침대나 소파에서 뒹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거나 두통을 동반하는 잠에 취한다. 난 언제나 큰돈되는 글을 쓰게 될까, 내놓은 집은 언제나 나갈까, 떠난 그는 정녕 아주 가버린걸까....
그런데 정작 궂은 날보다 더 나를 처지게 하는건 비 그치고 나타난 뒤의 햇살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를 보면서 '눈이 부시다'는 신체의 불편함을 호소하는지도 모른다.
우울감과 좌절속에 빠져있을땐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그 무엇도 ,연락해야할 그누구도 떠오르지 않지만 날이 개고 눈부신 하늘이 펼쳐지면 삶의 전장으로 , 화해의 공간으로 다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회한따위 벗어던지고 세상과 어울려 '끝나지 않는 마임'을 계속 해야 한다.
그래서 아마도 시인 엘리엇은 겨울끝에 다가온 봄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난 내 안으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갈수 있는 궂은 날이 좋다. 세상이야 어찌 되건, 그들이야 어떻게 살건 내 알바 아닌, 나만의 세계, 나만의 공상에 빠질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그렇다면 진정 홀로되는 그 시간을 즐길줄도 알아야 하는것이다.
아니면, 비로소 내 안 깊은 우물 안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궂은날, 그 멜랑콜리함을 기다리는건지도 모른다. 그들을 만나 비로소 손을 잡고 허그를 하고 그때 못한 사과의 말, 그리움의 언어를 전달할수 있게 되는 그런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