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아무래도 술을 마실것 같아 차를 두고 가기로 한다. 대신 걸어서 10분거리의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한다.그날따라 지하철은 한산했다. 하기사 러시아워도 아닌데 붐빌이유가 따로 없었다. 우진은 시간을 본다. 3시 20분.
지하철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가면 약속시 인 4시에 딱 맞출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차에 몸을 싣고 흔들거리며 그는 약속장소로 향한다.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의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는 모양새다. 이거 난처하게 됐군, 하하고 우진은 폰검색을 하는척 한다.그러나 맞은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보더니 급기야 자리를 건너와 그의 옆 빈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불편해진 우진은 앉은채 옆으로 살짝 이동하자 여자는 "저, k선생님이시죠?
라고 물어왔다.
우진은 더이상 그녀를 모른척한다는게 불가하다는걸 깨닫고 폰에서 시선을 거두어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며 살짝 웃어보인다. "네, 맞아요"
그말에 여자는 "제가 한 눈썰미 하거든요"하면서 자기 백에서 자그만 수첩과 펜을 꺼내 우진에게 들이민다. 우진이 이거 뭐지?라는 얼굴을 하자, 사인요.제발요,라며 여자는 애원조로 말한다.
이 나잇대의 학생들을 가르친게 엊그제 같은데 학교를 떠난게 벌써 5년이 다 돼간다는게 우진으로선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진은 e.e커밍스로 국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고 이후 2년간 지방대에서 재직하다 모교 선배 s의 도움으로 모교인 t대로 옮길수 있었다. 영문과 교수중 국내박사는 우진 뿐이어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우진은 그럴수록 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다. 또한 태생부터 병약하게 태어난 그의 우수에 어린 실루엣은 뭇 여학생들의 동정과 연민을 끌어내 그는 자타공인 영문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로스트 제너레이션과 비트 제너레이션의 차이와 공통점을 강의하던날, 유심히 그를 바라보는 여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빨간 하이힐에 타이트한 미니스커트에 반팔 니트 상의를 입고 있었고 발을 꼰채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우진과 그녀의 눈빛은 서너번 마주쳤고 우진의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스치고 가는걸 느꼈다.그리고는 수업이 끝나자, 그녀는 제일 먼저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우진이 뒤늦게 수업물을 챙겨 강의실을 나오는데, 뒤에서 "교수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는 뒤를 돌아보았고 좀전의 그녀가 자기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오는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술 사주세요"
그녀의 대담하다 못해 도발적인 그 요구에 우진은 잠시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으나 미안, 내가 마무리 해야 하는 논문이 좀 있어, 하고는 그 자리를 피하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 강미영이예요"라며 자기 이름을 밝혔다. 강미영...우진은 그제서야 자기가 한번도 출석을 부르지 않은걸 느꼈다. 아, 그런가, 기억해두지, 하고는 그가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달려와서 그의 팔짱을 끼면서 애원조로 얘기했다.. 딱 한잔만요...
그녀는 남도 출신으로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니고 있다고 자신을 밝혔다. 영문과보다는 심리학을 선호했지만 고교 영어교사인 아버진의 강권으로 떠밀리다시피 영문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그런만큼 전공에 별다른 애착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던 우진은 제자와 단둘이 그것도 학교 인근 술집에 마주 앉아있다는게 구설을 일으킬거 같아 딱 한시간이 되었을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담엔 제가 낼께요"라며 그녀는 서둘러 술집을 나간다. 다음이라니...우진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 스스럼없이 자신을 오픈하는 그녀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후 다시 그녀를 강의실에서 보았을때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판 남처럼 굴었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남학생하나와 붙어 앉아 우진의 깅의는 듣지도 않고 장난을 쳤다. 우진은 주의를 줄 요량으로 헛기침을 몇번 했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해서 그 수업이 끝나고 그녀가 그 남학생과 강의실을 나갈때 "강미영"하고 우진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마치 광고 속 슬로우 모션처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향 부모님이 해주신 거라며 학교 근처 오피스텔형 원룸으로 우진을 안내했다. 우진은 그녀에게 한팔이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번씩 그녀의 손을 떼어냈지만 미영은 잡은 그의 팔을 절대 놓지 않았다.
"내가 좋은가?" 우진의 그말에 그녀는 보조개를 파며 살짝 웃어보인다.
"주무시고 가셔도 돼요"라는 미영의 말에 우진은 화들짝 놀라 성큼 소파에서 일어난다. "이거 늦었군. 저녁 잘 먹었어"라며 그가 갈 차비를 하자, "쌤 강의 근사해요"라며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온다. 우진은 그녀의 팔을 풀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의 입술은 우진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미영이 그의 바지 지퍼를 내리려고 할때 그는 그녀를 거칠게 밀치고 그 방을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일주일후, 우진은 그녀의 부고를 듣게 된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그리고 우진은 근래 그녀와 가까웠다는 주위의 진술에 경찰에 출두해서 참고인 진술까지 받아야했다. 미영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알았다고 담당형사 민우가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민우는 빤히 우진의 얼굴을 쳐다본다. 우진은 그날밤 둘의 입맞춤이 자꾸만 자기안에서 복기되는걸 느끼다 결국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흑흑 흐느꼈다. 그러자 형사 민우는 티슈 몇장을 꺼내 그에게 내민다.
결국 미영의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우진은그 대학을 나와야 했고 한동안 백수로 살아야 했다. 미영이 죽은게 스물둘이었고 우진은그녀보다 열살 남짓 많았으니 교수와 학생의 신분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연애도 결혼도 가능한 관계였다. 하지만 폐쇄적인 학교라는 사회는 둘의 사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녀가 죽은 뒤 , 그가 그녀에게 낙태를 강요해서 그리 된거라는 소문까지 돌아 우진을 끌어준 선배 s역시 손을 쓸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사회라는게 좁디 좁아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우진은 서울권 대학에 자리를 잡는다는건 불가했고 겨우겨우 수도권 2년제 대학에 자리를 하나 얻었다. 교양영어 수업이었고 회화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우진은 센터에서 밀려났다는 자괴감에 빠졌지만 마냥 그러고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센터에서 밀려났다는 것은 더 이상 센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해서 그는 오히려 그걸 즐기기로 결심한듯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글로 표현했다. 성性과 사랑, 성聖과 세속에 관해.
작품 속의 배경을 놓고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대학사회가 제일 친숙한지라 그는 대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잡다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갔다. 교수들의 암투와 위선, 교수와 제자의 사랑, 학생들끼리의 경쟁등에 관해.
그렇게 그는2년을 영어회화를 강의하면서 야인이 다 되어갔다. 그러다 어느날 자기를 t대에 이끌어준 s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부 학생들이 자신의 복귀를 위한 청원서를 받아 총장에게 제출했다는 것이다. 마침 젊은 총장이 취임한 지 얼마 안됐고 그는 나름 리버럴한 마인드를 갖고 있어 우진을 면담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을 알려왔다.
우진은 대답을 미루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야인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자유로운 생활과 센터로 복귀해 다시 위선의 탈을 쓰고 사는 두가지를 놓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s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는 더이상 그 학교에 미련이 없고 현재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의 복직은 없던 일이 되는가 싶었는데 어느날 총장이 그의 연구실로 직접 찾아왔다. 그옆엔 자기를 이끌어준 s도 있었다.
우진은 마침 강의가 모두 끝나 일찍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고 그걸 눈치챈 총장과 s는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제안을 했다. 새삼 복직을 거론하랴 싶어 우진은 자기가 자주 가는 국밥집으로 둘을 안내했고 거기서 셋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 술을 퍼마셨다
그리고는 우진이 눈을 떴을때는 허름한 여관방이었고 총장과 선배 s는 보이지 않고 낯선 여자가 알몸으로 자기 옆에 누워있다. 화들짝 놀란 우진은 서둘러 옷을 걸쳐입는다. 그러는데 여자가 일어나면서"가는거야?"라며 말을 걸어온다.
"다른 두사람은?"하고는 묻는 우진의 목에 그녀는 팔을 둘러왔다. "나 강미명" 이라고 그녀가 속삭였다. 누구? 우진은 움찔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말에 우진은 그녀를 찬찬이 뜯어본다. 그말을 들어선지 그녀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며 뾰족한 턱선이 예전 미영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미영이라 이름을 밝힌 그녀는 빠르게 자기입술로 우진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는 그가 입고 있던 셔츠며 내의를 벗겨내기 시작한다.
복직을 하지 않으면 이 일을 누설하겠다는 협박을 받은지라 우진은 할수없이 t대학으로 돌아와야했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했다. 매춘부와 여관에서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교내에 퍼지면 그는 파면을 넘어 구속까지 될수 있는 처지라 그는 총장이, 자기를 끌어준s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일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소설을 계속 써나가야했다. 성과 사랑에 대해, 성과 세속에 대해. 그렇게 그는 t대를 대표하는 리버럴한 지성의 표상으로 거듭났고 그를 둘러싼 찬반 양론이 일수록 t대는 자연스레 홍보되었고 그렇게 정교수까지 무난히 진급해 머리가 반백이 될 때 정년퇴직을 맞았다.
그게 벌써 5년이 됐다는게 그로선 믿기지 않았다. 퇴직후에도 그는 e.e 커밍스와 로스트제너레이션에 관한 다수의 책을 냈다..그러나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性과 관련된 강연청탁이 곧잘 들어와 결국 응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밤이면 음란 사이트를 검색하기까지 했다.
4시, 우진이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만나기로 한 영화감독 a와 시인b가 먼저 나와있다. 둘은 이미 불콰하게 술이 오른 상태였다. 셋의 인연은 우진이 2년제 대학에서 소위 '물먹기'를 하고 있을때 시작되었고 그렇게 a와b는 언젠가 우진의 야한 소설을 영화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날도 a와 b는 영화 이야기를 해댔고 우진에게 새로 원작소설을 하나 써달라고 청을 했다. 교수와 제자가 학점을 놓고 벌이는 계약연애 같은 부류의 이야기를.
우진은 알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 늦은밤, a와 b를주점에 남겨둔채 자리를 먼저 떠서 밖으로 나온다. 저만치 도시의 빌딩숲에 처량하게 이지러져 있는 달을 보자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빈택시 한대를 불러세운다. 그렇게 우진은 오랜만에 서울의 눈부신 야경속을 뚫고 달린다..
그가 목을 매기 전날 시내 모처에서 지인 둘과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는 증언이 나왔다. 주점 주인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오후 네시경 만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술을 주문해 자정까지 마셨다고 한다. 그 정황으로 보아 우진의 자살은 예정된거라기 보다는 충동적일 확률이 있다는 생각을 민우는 해본다. 그리고 병력을 조회한 결과 그가 수년동안 깊은 우울증을 앓아왔고 한때 정신병동 생활을 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사건을 종결지어도 될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