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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영 Mar 15. 2023

이달의 이웃비

7. 비밀요원



   병식과 네 번째로 실종자를 찾기 위해 만난 날, 동석은 병식에게 고백했다.

 

  “병식 씨 이야기를 써요.”

   “나, 왜요?”

   “병식 씨가 좋은 이웃이니까. 사람들이 병식 씨 이야기를 많이 알았으면 해서.”

 

   병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써 놓고 이제야 자백하는 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그걸 알면서도 동석은 자신이 솔직하다고 믿고자 하는 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좋아해요. 병식 씨 이야기를. 배순경을.”

   “배순경이요?”

   “네. 배순경 이야기를.”


   병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동석은 조금 불안해졌다. 동석이 아무리 좋은 이웃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단 한들, 어쩌면 실종된 후에야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이웃들과, 그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 살아 내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이웃해 지내는 마음과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병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들, 그것은 비겁한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엔 그것이 공동체에 아무것도 보탠 것 없이 손쉽게 이웃으로 받아들여진 자기 나름의 이웃비를 지불하는 방법이라 동석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실은 형에게 한 번도 지불하지 못한 이웃비를 후불로 처리하기 위해 손쉽게 병식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잃어버린 돌보는 자의 지위를 병식을 통해 다시 획득하려는 건 아닌가. 나는 다만 선 밖에 사람을 두고 선한 이웃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병식을 선 밖의 이웃으로 붙잡아 두는 것 아닌가. 이 문장에서 ‘우리’는 명백하게 병식을 제외한 우리라는 것, 그것이 결국 동석이 병식에게 행하는 모든 태도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이런 진실은 결코 병식에게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대신 동석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병식 씨가 싫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그만둘게요. 올린 글도 다 내리고.”

   “나는,”

    병식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물었다.

   나는, 우스워요?”


   병식의 질문은 동석에게 이런 의미로 들렸다. 내가 우습나요. 내가 만만한가요. 그러니 그렇게 함부로 허락도 없이 글의 소재로 삼아도 된다고 생각했나요. 나를 바보같이 묘사하면서 웃겼나요. 관객석에서 병신춤을 보듯 웃고 손가락질하며 저 병신 또 병신 짓 하네, 하면서 나를 보고 웃었나요. 병식의 말은 어느새 형의 음성으로 동석의 귀에 내리 꽂혔다.

   동석은 부끄러움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형에게 그랬듯 동석이 병식에게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병식의 무해함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무지에서 비롯될지 모를 악의 없는 잠재적 가해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무해함을 이용하고야 말 자신의 속물성을 일깨우는 대상화된 실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관념의 이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웃이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요, 나는 그저,”

   동석이 서둘러 변명의 말을 꺼내려는데 병식이 덧붙였다.

   “나는.”

    병식이 말했다.

   “우스우면 좋겠어요.”

   “네?”

   “웃긴 거 좋아요. 무도처럼.”


   그제야 동석은 병식의 말을 이해했다. 병식은 동석을 비난하는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궁금한 거였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웃들을 즐겁게 하나요? 웃게 하나요? 병식은 다만 알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좋은 이야기인가요. 이웃들이 잃어버린 웃음을 돌려주나요. 쉽게 지워지는 따뜻한 마음을 지켜 주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는 배순경이니까.


  “병식 씨 이야기가 웃겼으면 좋겠어요?”

  “네. 무도처럼.”

  “무도처럼요?”

  “네. 무도 친구들처럼.”


   그 말을 듣자 병식과 처음 만나 나눴던 대화가 기억났다. 그날 동석은 도서관 앞 벤치에서 구매자를 만나기로 하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뭘 할까 하다가 핸드폰으로 무한도전을 보며 기다릴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반가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 동석이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는데 남자가 말했다.


   “무한도전 512회. 2016년 12월 24일 방영. 산타 아카데미.”


   그가 가리키는 건 동석의 핸드폰에서 재생되고 있는 무한도전이었다. 뭐지 싶어 영상을 정지시키는데 남자가 황급히 제지하며 옆에 앉았다.


  “봐요.”

  “네?”

  “계속 봐요.”


    어리둥절한 채 동석은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남자가 옆에 앉아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보기 시작했다. 웃긴 장면에서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몸을 앞뒤로 흔들어 가며 웃었다. 혹시 동석이 웃긴 장면을 놓칠까 봐 걱정되는 듯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치기도 했다. 그러다 동석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그가 웃는 타이밍이 영상에 입혀진 웃음소리보다 매번 미세하게 앞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느 장면에서 웃어야 할지 미리 예습해 온 성실한 웃음 방청객처럼 웃고 있었다. 멤버들이 내뱉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기도 했다.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모든 장면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형도 그랬다. 그래서 동석은 눈치챘다. 남자도 무한도전 유니버스의 비밀 요원 중 한 명이라는 걸. 그가 배순경이었다.      




   동석도 알고 있다. 병식을 무해하게 그리는 것,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라는 고정된 캐릭터 안에 가두는 것은 결코 병식을 위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병식을 ‘우리’ 밖으로 내몬 채 선 밖의 ‘그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무해함을 획득해야만 가능하다는 개똥 같은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의 지위를 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듯이. 그리고 동석 자신은 절대 그 ‘우리’에서 벗어난 적 없으며 벗어날 일 없다는 듯이. 선 밖의 이웃의 이야기를 강조할수록 동석이 증명하고 싶은 건 이런 것이다. 나는 ‘우리’ 안의 인간입니다. 나는 애써 이웃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우리’에 속하는, ‘우리’라는 걸 부정당하지 않은, 결코 실종당하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절대적 ‘이웃’의 지위를 가진 당신들의 이웃입니다.

   사실 동석이 병식을 표현하는 방식은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지위를 부여하고 그 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하는 약자의 집단에 베풀어지는 찬양과 찬송의 메아리와 동일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지워지고 실종된 집단에게 고정된 편견과 한정된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할 때는 당연하지만 결코 비난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찬양하고 우러른다. 모성 신화가 그랬고, 완전무결할 것을 요구받는 피해자와 고발자들, 그리고 병식이 또한 같은 방식으로 주어진 (용인된) 이웃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감지덕지. 그러니까 동석이 병식에게 강제로 나누고자 한 것은 브로콜리나 존 쿠삭, 너그럽게 포용(해 주는) ‘우리'라는 이름이나 다정한 이웃이 아니라 이런 끈적하고 지저분한 부사어다. 감지덕지. 고작인 내가 감히 인 당신과 불구하고 이웃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지덕지인지!라는 문장을 강제로 병식에게 무료 나눔 하려 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동석은 병식에게 더 무해할 것을 요구하며 유해한 언어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재가공된다. 기억은 그렇게 기록되는 것으로 삭제된다. 더 많은 다정한 이야기를 위해서 어떤 이야기는 없어져야 한다. 실종 경보 문자에 이런 삭제의 기억은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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