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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Jun 11. 2022

제가 우울증이라고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신건강의학과 초진 예약 날짜가 다가오기까지 무려 3주를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열었더니,

세상에나! 대기석 의자가 빼곡히 차 있었다.

색깔이 사라진 흑백 세상에 온 기분에 휩싸였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니.......!



내 BDI(벡 우울척도검사) 수치를 본 의사 선생님은 긴소매 속에 숨겨 놓았지만 떨리고 있는 내 손가락을 힐끗 보시고는 약간의 뜸을 들이고 말씀하셨다.


"휴... 이 정도면 사회생활이고 뭐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신 거예요?"


의사의 말을 듣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의사의 표정과 검사지를 계속 다시 보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나 아프구나,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구나.


순간 나는 '묻는 말에 적당한 대답을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사이니까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어..... 어.... 버텼어요.... 그냥...... 버텼어요...."

그리고는 뇌의 명령을 거치지 않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하라는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쏟아졌다.

그곳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티슈가 손에 닿는 위치에 준비되어 있었다.


"말씀  하셔도 돼요. 이건 수치만 봐도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불안, 강박, 공황을 동반한 우울증이고요,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입원하기 직전이세요. 실례지만 무슨  하시나요?"


..........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차마 내가 '유치원 교사'라고는..!

왠지 교사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면 교육계에서 교사로서의 수명은 끝난 것 같은 두려움, 심지어 나는 미취학 아이들과 감정적인 교류가 많은 '유치원 교사'인데 그동안 유아교육자로서 애써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부터가,

우울증 환자인 나부터가,

모든 아픔을 가진 사람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고 교육하던 나부터가,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대해 두려움과 편견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사실 대충 짐작했으면서도, 그럴 것 같아서 정신건강의학과에 왔으면서도, 수치가 증명해주는데도, 머리는 우울증이 맞다는 걸 인지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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